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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32. ‘외신 대변인’ 대외협력보좌관실에 특채된 인사로 또 다른 김영О 박사가 있었다. 나종일 차장이 그를 특채했다. 김 박사의 선친과 나 차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다, 둘이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김 박사는 런던정경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거쳐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1] 그는 점잖고 신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김영О 박사는 국정원의 외신 대변인 자격으로, 해외 언론을 조정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김 박사의 해외언론 조정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 말이 해외언론 조정 업무이지, 실상은 은밀하게 노벨상 수상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외 언론의 우호적인 논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 임무.. 더보기
31. ‘S 사업’ 또는 ‘N P 프로젝트’ 이종찬 원장은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대중의 노벨상 노욕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김대중으로부터 차기 대권을 이어 받기 위해서는 노벨상을 안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원장이 대외협력보좌관실을 신설한 것은 이러한 나름의 정치적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벨상 업무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종О 대외협력보좌관이 가장 적임자였다. 이 보좌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북구어를 연수한 사람이었다. 노르웨이어와 관련해서는 가장 전문가였다. 그는 동구과장과 동구단장을 거쳤기 때문에 북구 사정은 누구보다도 밝았다. 국정원 내에서 전체적으로 노벨상 업무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었다. 사실, 노벨상 업무는 해외공작국 동구과 북구팀의 오래된 업무였다. 노르웨이와 스.. 더보기
30.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나는 여기저기 옮길 곳을 알아 봤다. 비서실 산하 법률보좌관실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법률보좌관실의 팀장과 간단한 대면 인사를 했다. 결국 그 자리에는 서울법대 출신 다른 친구가 갔다. 그 즈음 원장 비서실 산하에 새로 생긴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곳에서도, “같이 일할 의향이 있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며칠 후 이종О 대외협력보좌관과 면담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1998년 6월, 연수기간 중에 김 대통령의 방미 행사에 차출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협력관은 뉴욕 부총사로 일하면서 뉴욕에서의 경호정보 지원활동을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안면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불러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단도직입으로 전입희망 의사를 밝혔다.나중에 .. 더보기
29 ‘오칠남’ 신세 1998년 6월, 외환위기 여파로 인해 1년 간의 연수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귀국했다. 새로 보직을 받은 부서는 국제정책실 시사정보과(이하 시정과)라는 곳이었다. 원래는, 연수 이전 부서인 해외공작국으로 돌아가야 정상이었지만, 내가 귀국할 즈음엔 해외공작국에는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정권교체 후, 국정원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한바탕 난리를 쳤다. 해외공작국은 조직을 축소하고 인원을 감축했다. 조직이 너무 방대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연수 인원의 보직 문제는 제쳐놓았던 모양이다. 대신 엉겁결에 기구가 대폭 확대된 국제정책실(해외분석 부서)에는 자리가 남아 돌았다. 결과적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다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시정과는 국제정책실을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든 과였다. .. 더보기
28. 카일라일의 추억 나는 여러 군데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펜실바니아 주의 카일라일(Carlisle) 이라는 소도시에 있는 디킨슨 법과대학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었다. 등록금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시골에 위치해 있는 점이 좋았다. 애팔레치안 산맥 안의 시골 벽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아마 1년 간은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나중에 현지에 도착해서 보니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시골 구석에도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제는 미국의 어느 시골 벽지에도 한국 사람이 없는 동네는 없는 것 같다. 카일라일은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더 없이 친절했다. 마을 전체가 가로수에 푹 파묻힌 듯, 수백 년 된 가로수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1] 법원과 교회와 참전.. 더보기
27. “여긴 착한 사람이 있을 곳이 아냐” 정보협력과에서 1년 반 가량 일하고 나니, 해외로 연수 나갈 기회가 생겼다. 과의 계장들은, “전입 온 지 얼마 안되었다”며 나의 해외연수를 반대하는 눈치였다. 과에서는 일할 인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체로 젊은 직원들의 연수를 별로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가끔 연수를 신청하는 직원과 남아 있는 직원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 잘하는 직원은 연수 가지 못하고, 일 못하고 꼴보기 싫은 직원이 연수를 가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도 종종 일어났다. 고맙게도 신 과장이 직접 나서서 계장들을 설득해 주었다. 그는, “젊은 사람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나의 연수를 강력히 밀어 주었다. 신 과장 덕택에 나는 스타일 구기지 않고 해외연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연수를 떠.. 더보기
26. 접대와 ‘특조’ 각설하고, 정보협력과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국정원장과 차장 등 간부들의 해외 출장을 준비하는 일과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들을 방한 초청하는 일이었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채널을 새로 구축하거나, 기존의 정보협력 채널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를 방한 초청하는 사업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초청교섭은 해당국에 파견된 파견관들이 직접 하지만, 일단 초청이 되어 국내에 들어오면 정보협력과에서 모든 행사를 주관했다. 보통 외국 정보기관 고위 인사들의 초청 목적은 원장과 차장의 접견을 주선하는 것이었지만, 향응과 접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정보협력과 요원들은 이들의 방한행사를 기획하고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 정보협력과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익힌 후, 나는 캐나다와 루마니아 정보기관과의.. 더보기
25. ‘썅캐’의 세계 95년 2월 어느 날, 나는 해외공작국의 이병О 행정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아주과에서 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해외공작국 아주과는 젊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우선 과의 분위기가 괜찮았고 업무량도 적당했다. 다른 과에 비해 해외 파견관으로 나갈 기회가 일찍 찾아 오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해외공작국의 핵심과는 북미과였다. 하지만, 나는 공작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북미과는 과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라, 아예 처음부터 북미과로 갈 마음은 없었다. 후에 실지로 해외공작국에 가서 살펴 보니, “북미과에 안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거긴 업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의 분위기도 살벌했다.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지, 북미과 직원들.. 더보기
24. 연예계라는 요지경 세상 나는 우리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 전체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으로 타락해 있는지를 절감했다. 정계와 재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법조계, 의료계, 종교계, 교육계, 문화계, 예술계, 언론계, 연예계… 우리 사회 어디를 둘러 봐도 희망의 싹이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내가 들여다 본 우리 사회는 이미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로 부패와 뇌물, 협잡과 비리가 만연했고 반칙과 편법, 음모와 모략과 술수가 판을 쳤다. 건전한 직업윤리, 정직과 양심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황우석, 신정아라는 두 명의 걸출한 스타가 나타나,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를 온몸으로 웅변해 보였다. 내가 본 9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도 이미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정.. 더보기
23. “뉴스로 뉴스를 덮어라” 문민정권의 출범은 그야말로 창대했다. 애초에 문민정권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민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사정을 칼날을 들이 대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온 사회에 겁 없는 망나니의 칼춤이 어른거렸다.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군대 내 사조직과 특정 인맥을 과감하게 잘라 냈다. 엘리트 장교가 쫓겨 나간 자리엔, 또 다른 부패한 인물들이 들어섰다. 비록 기득권 층의 반발과 개혁세력을 준비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법조계와 교육계 등 사회 각 분야의 뿌리 깊은 고질병을 도려내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시도한 점은 인정해줄만 했다. 몇 가지 부분에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민주화에 큰 진전을 이루어 냈다.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 더보기
22. 문민정권과 언론 문민정권은 지나치게 여론에 신경을 썼다. 대통령 자신이 언론의 보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짧은 신문과 생활과 대정실 보좌원으로 근무하면서 정권과 정보기관과 언론간의 관계에 대해 참 많이도 보고 들었다. 내가 대정실에 근무하던 94년도에도 이미 정권과 언론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 정권도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문민정권은 언론 사정이라는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직접 들이대지는 않았다. 한 번은 오 실장이 조선일보 김철 부장을 초청하여 대정실 직원들에게 언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강연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김철 부장은, “대한민국의 언론은 무조건 조져야 한다. 주먹으로 대하는 게 제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얘.. 더보기
21. “여의도 김소장입니다” 나는 문민정권의 화려한 비상과 허무한 결말이, “김영삼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에 많은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간파하고 충족시킬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성향 덕택에 국민들로부터 초유의 인기를 누렸다. 한 때 지지율이 90%대에 육박했다. 대통령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지지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 그의 지론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해 인정한 셈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조깅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머리 좋은 사람을 찾아 쓰는 데는 별.. 더보기
20. “안기부가 정무수석 직속이냐?” 돌이켜보면, 대공정책실 보좌원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보고 들었다. 권력의 턱 밑에서 일하다 보니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었다. 장막 뒤편에서 정치 권력이 지어 보이는 음흉한 미소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 정치 권력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종필 총재의 관계가 깨어지는 과정은 실시간으로 중계하듯이 지켜 보았다. 초등학교 어린애들 다툼 같아 보였다. 아니 그보다도 못해 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사건사고가 봇물 터진 듯 일어나고, 사회 각계 각층의 집단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했을 때, 아마추어 문민정부가 갈팡질팡 허둥거리던 장면도 가까이서 관찰하였다. 정치와 언론의 악어와 악어새 같은 기이.. 더보기
19. 계명구도와 낭중지추 오정소 실장은 “문민정권의 해결사”였다. 모든 악역을 도맡아 했다. 실제로,“오 실장이 96년 12월, 전격적으로 잘리지만 않았더라면, 문민정권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1] 나는 이러한 견해가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오 실장은 평소 계명구도(鷄鳴狗盜)와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중국의 고사성어를 즐겨 인용했다. 계명구도란 말은, “점잖은 사람이 배울 것이 못 되는 하찮은 기술이나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은 재주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낭중지추란 말은, “능력 있는 사람은, 마치 가죽부대 속에 들어 있는 송곳처럼, 그 능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다”라는 말이다. 오 실장은 특별히 재주 있는 사.. 더보기
18. ‘쉰’ TK vs. ‘신’ TK 보좌관과 보좌원간의 업무분장이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실장과 부실장의 개인적인 심부름이나 비공식적인 잡무도 모두 내 차지였다. 대체로 이 보좌관이 주로 오 실장을 챙기는 데 비해, 보좌원인 나는 세 명의 부실장을 챙겼다.. 제 1 부실장은 임경О 단장이었는데, 그는 정치, 학원, 종교 분야를 담당했다. 임 단장은 김기섭 기조실장의 대구 영남고 후배였다. 그 후, 그는 오 실장이 차장으로 승진되자, 대공정책실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 우스개 소리로 “TK도 여러 가지”라는 말이 돌았다. 이른바 『신TK』와 『쉰TK』가 있다고 했다. 구정권에서 잘 나가던 TK 인사들은 쉰TK라고 불렸고, 신정권에서 새로 부상한 TK 인사들을 신TK라고 불렸다. 안기부 내에서는 영남고 출신들이 대표적으로 신TK로 분류되었다.. 더보기
17. 문민정권의 ‘넘버 쓰리’ 내가 부속실에서 상관으로 모셨던 오정소 실장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 실장을 문민정권의 아이콘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문민정권의 핵심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는 문민정권의 막후 핵심 실세였던 김현철 씨와 고등학교와 대학(고대 사학과) 동창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이름을 불러주면 최측근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가령, “영춘아 오늘 나랑 조깅 하자”라고 말한 게 알려지면, 김영춘 의원이 금방 최측근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한 번은 김 대통령이 서울시를 순시하면서, “정소는 어디 갔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금새 “오정소가 최고 실.. 더보기
16. 새끼 보좌관 나의 신문과 생활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대공정책실 부속실 보좌원으로 불려 갔기 때문이다. 신문과에 배정된 지 한 달여가 지난 때, 인천지부장에서 새로 대정실장으로 부임한 오정소 실장이 나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나를 대공정책실 부속실의 보좌원으로 임명했다. 내가 보좌원으로 불려간 것은 일종의 행정착오의 성격이 있었다. 왜냐하면, 보좌원은 대개 부서에 배치된 지 1, 2년이 지나, 부서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 아는 직원 중에서 뽑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오정소 실장은 내가 부서에 배치 받은 지 1-2년 지난 된 직원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고려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나의 학력 등을 보고 대충 뽑았을 것이다. 신문과장은 내가 부속실로 불려가는 게 못마땅했던지, “오 실장과 무슨 사이냐? 어떻게 해.. 더보기
15. “같이 좀 못하자”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며칠 휴가를 보낸 뒤, 나는 94년 1월 초부터 소위 “남산”으로 출근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로 알려진 “남산”이었지만, 나는 거저 무덤덤한 기분이었다. 당시 남산에는 국내 정보부서뿐만 아니라, 대공수사와 외사방첩 부서, 그리고 감찰실 등 안기부의 핵심 부서가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국내정보 수집부서인 대공정책실로 발령이 났다. 우선 대공정책실이라는 명칭부터 좀 설명하는 게 좋겠다. 대체로 국정원의 여러 부서의 명칭은 그 부서의 실제 업무 성격과 거리가 있다. 굳이 “위장명칭”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대정실은 명칭대로라면 간첩을 잡기 위해 정책을 세운다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어야 제격이겠는데, 실제로는 국내 정치정보 수.. 더보기
14. 국정원을 지망하려는 후배들에게 이상으로 정규과정 1년간의 교육에 대해 주마간산 식으로 회상해 보았다. 나의 경험이 국정원에 입사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젊은 후배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국정원 정규과정 교육 경험을 마무리 하면서, 이 기회를 빌어 국정원을 지망하려는 젊은 후배들에게 내가 평소에 개인적으로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몇 마디 전하고자 한다. 요즘은 국정원이 꽤 인기 있는 직장이라고 한다. 입사 경쟁도 아주 치열하다고 한다. 도청문제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서의 국정원의 인기는 여전한 모양이다. 내 개인적인 짐작으로는, 국정원의 근무여건이나 급여수준 등이 어느 정도 공개되어 더욱 그런 경향을 부추기고 있지 않나 싶다. 사실 국정원의 봉급은, 다른 모든 사항들과 마찬가.. 더보기
13. 부적부번호 27444 후반기 교육은 출퇴근 교육이었다. 전반기에 비해 훨씬 여유가 있었다. 반도 재조정되었다. 각자 보직하게 될 업무 위주로 소규모 반으로 재편성 되었다. 우리들은 국내정보반, 해외정보반, 북한정보반, 공작반, 수사반, 심리전반, 통신반 등 각각 세부 전문 직렬 별로 나누어졌다. 나는 국내정보반에 배속되었다. 전반기 교육을 마칠 즈음에 훈육관과 진로 상담이 있었는데, 나는 “국내정보 쪽으로 가고 싶다”고 말해 놓은 터였다. 우리 반은 남녀 합해 모두 15명이었다. 후반기 교육은 주로 현장실습 위주의 교육이었다. 예를 들면, 면담유출 기법을 실습하기 위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사를 접촉하여 특정한 정보를 알아내 오는 과제가 부여되기도 했다. 그 밖에 미행 감시하는 요령이라든가, 공작원을 접촉하는 방법, 공작망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