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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6. 해외공작국에서

27. “여긴 착한 사람이 있을 곳이 아냐”

정보협력과에서 1년 반 가량 일하고 나니, 해외로 연수 나갈 기회가 생겼다. 과의 계장들은, “전입 온 지 얼마 안되었다며 나의 해외연수를 반대하는 눈치였다. 과에서는 일할 인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체로 젊은 직원들의 연수를 별로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가끔 연수를 신청하는 직원과 남아 있는 직원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 잘하는 직원은 연수 가지 못하고, 일 못하고 꼴보기 싫은 직원이 연수를 가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도 종종 일어났다.

고맙게도 신 과장이 직접 나서서 계장들을 설득해 주었다. 그는, “젊은 사람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나의 연수를 강력히 밀어 주었다. 신 과장 덕택에 나는 스타일 구기지 않고 해외연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연수를 떠나기 전 어느 날 신 과장은, “둘이서 부내에서 점심이나 먹자고 말했다. 청사 내에서 과장과 둘이 따로 식사해 본 경우가 없어 좀 의아하긴 했지만, 군소리 없이 응했다. 식사 후 같이 청사 내를 한 바퀴 산책하던 중에,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어렵지만, 너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일을 찾아 봐라.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너는 나보다 심성이 더 착한 것 같다. 여기는 착한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바닥에서는 착하다라는 말이 칭찬이라기 보다 욕으로 해석될 때가 많았다. 썅캐의 세계에서는, “착한 사람은 곧 공작관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공작관은 무자비하고 냉혈한이어야 한다는 미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신 과장의 진정 어린 충고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쉽게 하기 어려운 충고를 해 준 것이었다. 몇 년 후 연수를 마치고 그에게 귀국 인사를 갔던 적이 있다. 98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그 땐 이미 정권이 바뀐 후라 그의 입장이 아주 어려운 때였다.

그 날 우리는 강남의 진동횟집에서 소주를 한 잔 했다. 진동횟집은 언제나처럼 북적거렸다. 그는 말없이 소줏잔을 기울이다 갑자기, “전에 내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냐?”라며 불쑥 물었다. 나는, “, 생각은 해 보았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신 과장의 충고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미, ‘정보기관이란 곳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각설하고, 96 8월 실무에 배치된 지 3년 만에 다시 정보학교로 돌아왔다. 정규과정 시절에는 교육생 신분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이제 다시 교육생이 되니 마치 해방된 기분이었다. 연수기간은 2년이었다. 처음 1년간은 정보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받은 다음, 나머지 1년은 해외에서 현지 연수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김기섭 기조실장은 정치공작을 하던 돈을 직원들 재교육하는 데 쓰겠다며 직원들을 연수에 엄청난 예산을 투자를 했다. 정보학교에서 영어, 일어, 중국어, 노어를 가르쳤는데, 네 과정을 합해 매년 백 명 가량 선발했다. 영어 과정은 전체 60명 가량이었는데, 15명씩 4개 반으로 나누었다. 나는 영어 D반에 배속되었다. 우리 담임이었던 신종О 교수님은 우리를드림반(Dream Team)으로 이름 짓자고 제안했지만, 나는돌반(Dol Team)으로 하자고 우겼다.

우리는 편의상 영어로 이름을 불렀다. 나는 제임스라고 불렸다. 제임스()는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읽은 외국 책인 『보물섬』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했고, 카투사 시절 가장 친했던 미군 병사의 이름이기도 했고, 유명한 007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했고, 더 중요하기로는 나의 성을 영어로 읽으면 비슷한 발음이 나기도 했다. 나는 김씨를 영어로, Kim이라고 하기보다는 Gim이라고 쓰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영어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웬만큼은 했다. 우리는 여러 명의 외국인 강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강사들은 대체로 친절한 편이었지만, 게 중에는 가끔 한국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영국 출신 강사와 감정 대립을 하기도 했다.

우리와 잘 어울리던 캐나다 출신의 젊은 강사가 있었는데, 한 번은 그가 수업시간 중에 자신들에게도 도청을 하는 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당신은 도청당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해 줬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 건지 그가 몇 년 후 마약사범으로 구속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결국, 그도 도청대상이 됐던 셈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영어만 배웠는데도, 영어 실력은 생각만큼 잘 늘지 않았다. 이미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다. 나는 영어 공부에는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지만, 카투사 시절에 익힌 기본 실력으로 그럭저럭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나를 특별히 아껴 주시던 신 교수님은, “제임스가 조금만 더 열심히 영어를 공부해 줬으면 좋겠다, 나의 나태함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곤 했다.

영어 듣기가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문법을 좀 소홀히 해도 토플 점수가 그런대로 나왔다. 특별히 준비하지 않았는데도 첫 토플 시험에서 627점이라는 고득점을 받았다. 나이든 선배들 중에서는 토플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정 수준의 토플 점수를 받지 못하면 연수 기회가 무산되기 때문이었다.

영어과정을 마칠 즈음에 1년 간 연수갈 학교를 찾아 보았다. 나는미국 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는 부설 어학과정에 가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들이 개설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프로그램들은 등록금만 비쌌지 교육내용은 그저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영어 과정보다는 법과 대학원 과정인 LLM 과정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에서는 1 년간 어학 연수비 상한선을 일 만 불로 정해 두고 있었다. 그 이상은 자기 부담이었다. 내가 가려던 법과대학은 대개 등록금이 1 5천불 이상이었다. 당연히 차액은 자체 부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참에 미국의 법과대학 프로그램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요즘은 한국에도 로스쿨이란 게 생겨 미국식 법과 교육을 도입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당시에는 미국 법대로 유학 가는 경우가 요즘처럼 흔하지 않았다. 나는 미군부대에서 법무행정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미국의 법과대학 시스템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미국의 정규 법과대학은 대학원 과정으로 3년간의 교육과정이다. 이를 쥬리스 닥터”(Juris Doctor), 또는 줄여서 그냥 제이디”(JD) 과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 법과대학들에는 JD와 법학 박사과정 사이에 1년 기간의 LLM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말하자면, LLM 과정은 본래 3년간의 정규 법과대학원 (JD과정)을 마친 학생을 위해 개설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법과 교육 체계는 지극히 실용적이라, “LLM이나 박사과정을 선택하는 학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법과대학 교수들도 대개는 평생 학문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변호사로서 실무를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LLM 과정은 대개 외국 학생들이 미국의 법학 대학원에 입문하는 과정으로 변질되었다. 대개는 외국 학생으로부터 현금을 벌어들일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LLM 과정이 대학의 랭킹 평가에도 영향이 있기 때문에 웬만한 법과대학은 모두 LLM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