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6. 해외공작국에서

28. 카일라일의 추억 나는 여러 군데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펜실바니아 주의 카일라일(Carlisle) 이라는 소도시에 있는 디킨슨 법과대학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었다. 등록금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시골에 위치해 있는 점이 좋았다. 애팔레치안 산맥 안의 시골 벽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아마 1년 간은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나중에 현지에 도착해서 보니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시골 구석에도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제는 미국의 어느 시골 벽지에도 한국 사람이 없는 동네는 없는 것 같다. 카일라일은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더 없이 친절했다. 마을 전체가 가로수에 푹 파묻힌 듯, 수백 년 된 가로수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1] 법원과 교회와 참전.. 더보기
27. “여긴 착한 사람이 있을 곳이 아냐” 정보협력과에서 1년 반 가량 일하고 나니, 해외로 연수 나갈 기회가 생겼다. 과의 계장들은, “전입 온 지 얼마 안되었다”며 나의 해외연수를 반대하는 눈치였다. 과에서는 일할 인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체로 젊은 직원들의 연수를 별로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가끔 연수를 신청하는 직원과 남아 있는 직원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 잘하는 직원은 연수 가지 못하고, 일 못하고 꼴보기 싫은 직원이 연수를 가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도 종종 일어났다. 고맙게도 신 과장이 직접 나서서 계장들을 설득해 주었다. 그는, “젊은 사람에게 자기 계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나의 연수를 강력히 밀어 주었다. 신 과장 덕택에 나는 스타일 구기지 않고 해외연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연수를 떠.. 더보기
26. 접대와 ‘특조’ 각설하고, 정보협력과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국정원장과 차장 등 간부들의 해외 출장을 준비하는 일과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들을 방한 초청하는 일이었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채널을 새로 구축하거나, 기존의 정보협력 채널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를 방한 초청하는 사업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초청교섭은 해당국에 파견된 파견관들이 직접 하지만, 일단 초청이 되어 국내에 들어오면 정보협력과에서 모든 행사를 주관했다. 보통 외국 정보기관 고위 인사들의 초청 목적은 원장과 차장의 접견을 주선하는 것이었지만, 향응과 접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정보협력과 요원들은 이들의 방한행사를 기획하고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 정보협력과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익힌 후, 나는 캐나다와 루마니아 정보기관과의.. 더보기
25. ‘썅캐’의 세계 95년 2월 어느 날, 나는 해외공작국의 이병О 행정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아주과에서 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해외공작국 아주과는 젊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우선 과의 분위기가 괜찮았고 업무량도 적당했다. 다른 과에 비해 해외 파견관으로 나갈 기회가 일찍 찾아 오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해외공작국의 핵심과는 북미과였다. 하지만, 나는 공작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북미과는 과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라, 아예 처음부터 북미과로 갈 마음은 없었다. 후에 실지로 해외공작국에 가서 살펴 보니, “북미과에 안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거긴 업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의 분위기도 살벌했다.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지, 북미과 직원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