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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6. 해외공작국에서

26. 접대와 ‘특조’

각설하고, 정보협력과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국정원장과 차장 등 간부들의 해외 출장을 준비하는 일과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들을 방한 초청하는 일이었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채널을 새로 구축하거나, 기존의 정보협력 채널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를 방한 초청하는 사업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초청교섭은 해당국에 파견된 파견관들이 직접 하지만, 일단 초청이 되어 국내에 들어오면 정보협력과에서 모든 행사를 주관했다. 보통 외국 정보기관 고위 인사들의 초청 목적은 원장과 차장의 접견을 주선하는 것이었지만, 향응과 접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정보협력과 요원들은 이들의 방한행사를 기획하고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 

정보협력과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익힌 후, 나는 캐나다와 루마니아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을 담당하는 일을 했다. 도쿄에 주재하던 캐나다 정보기관(CSIS) 요원은 던칸 레인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보협력차 분기에 한 번씩 서울에 들어 왔다. 그는 주로 북한 정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루마니아 정보기관은 서울에 신임 파견관을 두고 있었다. 당시 대우 자동차가 루마니아에 크게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우와 루마니아간에 인적 교류가 많았다. 대우 덕택에 루마니아와의 정보협력이 긴밀히 잘 이루어졌다. 루마니아 정보기관을 통해 북한에 대한 핵심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루마니아뿐만 아니라 기타 동구권 국가들과의 정보교류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이들 국가와의 경제 교류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은 우리의 경제개발 노하우와 경제적인 원조를 원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접근력을 원했다. 우리가 주로 동구권 정보기관 간부들을 초청할 때가 많았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대우와 기아, 현대 자동차 공장을 견학시켜 주는 등 산업시찰에 데리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재미있었던 사실은 이들이 한결 같이, “대우자동차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다음에 차를 바꿀 때는 반드시 대우차를 사겠다고 스스럼 없이 얘기하곤 했다. “동구권의 다른 차들보다 대우차의 품질이 좋다고들 했다. 처음에는 그냥 인사치레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당시 동구권에서는 대우차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 같았다. 나로서는 이런 얘기를 듣고 실소가 나왔다. 동구 공산권이라는 곳이 얼마나 형편없는 곳인지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대우차의 품질이 가장 후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 여러 자동차 공장들을 다녀 보면, 현대차나 기아차에 비해 부평에 있는 대우차 공장은 어딘가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어수선해 보였다. 

외국 정보기관 사람들을 주로 많이 데리고 간 관광지는 경복궁, 민속촌, 경주, 제주도 등이었다.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골프 접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방문객들에게 줄 선물은 세심하게 골랐다. 주로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토속 공예품을 선택할 때가 많았지만, 조금 중요한 방문객에게는 용봉향로의 모조품이나 신라 금관 모조품, 그리고 고려청자 모조품 등이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외국 정보기관 사람들의 초청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주로 저녁 행사였다. 이들을 접대하면서 나는 팔자에도 없는 요정과 룸살롱을 출입하게 되었다. 최고의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거나하게 접대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2차까지 이어질 때가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이를 특조라고 불렀다. “특별조종의 줄임말이다.

이문동 시절에는 용산에 있던 『을숙도』라는 요정을 많이 이용했다. 내곡동으로 옮긴 후에는 강남역 근처의 『다보』라는 한식점과 여러 룸살롱들을 이용했다. 국내 수집관에 물어보니 당시 『지안』이라는 룸살롱이 잘 나간다고 해서 내가 소개하기도 했다. 선배들은 특조 시에 아가씨들을 불러다 놓고 주의사항을 전달하곤 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마치 조방이 된 듯한 자괴감이 들 때가 있었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한마디로,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진국 정보기관 간부들은 발목이 잡힐까 우려해서인지, 특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후진국 정보기관 사람들일수록 특조에 홀딱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동남아 국가들의 정보기관 인사들도 특조를 특별히 밝히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슬람권 국가의 정보기관 사람들은 낮과 밤의 생활이 달랐다. 그들은 낮에는 술과 여자를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노골적으로 여자를 요구하곤 했다.

가끔은 황당한 경우도 벌어지곤 했다. 한 번은 옆자리에서 일하던 오 모 선배가 중앙아시아 어느 나라의 정보기관장 일행을 맞은 적이 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갓 독립한 나라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관계 개선과 정보협력에 관심이 많은 나라였다. 이들 나라들은 정정이 불안정하고 권력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정보기관장의 권력이 절대적인 나라였다. 정보기관장을 그 나라의 2인자 정도로 보면 틀림 없었다.

그들은 술도 화끈하게 마시고 놀기도 화끈하게 놀았다고 한다. 자리가 파하고 일행들이 모두 호텔로 돌아갔는데, 갑자기 여자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당시 현지에 나가 있던 파견관도 같이 따라 들어와 호텔에 함께 묵고 있었는데, 그들은 파견관에게 2차를 요구했던 모양이다.

파견관은 최대한 이들을 잘 모셔야 이후의 파견관 생활이 순탄해지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전 준비 없이 갑자기 아가씨를 찾으니 황당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천호동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밤늦은 시간에 천호동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몸을 파는 아가씨들은 대체로 외국 손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변태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애국심을 발휘하여 봉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화대를 더 얹어 주어야 한다. 단골집이 필요한 이유가 그런 데 있을 것이다.

천호동으로 진출한 일행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각자 아가씨를 데리고 호텔 방으로 헤어졌는데, 아가씨 한 명이 혼비백산 기겁을 하고 도망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후에 들으니, 이 낯선 외국 아저씨가 자꾸 뒷마당을 요구해서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유목민의 후예라 그런지 이들에게는 계간의 습성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한 번은 아프리카의 잠비아의 정보기관 차장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96년 초, 잠비아에 있던 북한 외교관이었던 현성일 씨 부부의 귀순 과정에서 잠비아 측이 협조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잠비아 정보기관 차장은 비서를 겸해서 여직원을 한 명 대동해 왔다. 그들은 유순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 호텔 측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불만을 들어야 했다. 잠비아 여직원이 투숙했던 방에 비치되어 있던 객실 용품들이 모조리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빗이며 간단한 소품은 물론이고, “가방에 들어갈 만한 물품은 전부 싹쓸이 해 갔다는 것이었다.

뒷처리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난감했다. 변상해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평소 정보협력 행사 시에, 호텔 측에 사전 양해를 구하고 예산에 부담이 갈 만한 고급 양주 같은 물품은 냉장고에서 빼내곤 했지만, 이처럼 생활용품이 없어져서 곤란해 지기는 처음이었다. 아프리카의 곤궁한 현실이 새삼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행사는 러시아의 특수부대인 알파 부대원들을 초청한 행사였다. 당시 러시아에 주둔했던 현대의 한 간부가 모스크바의 버스 안에서 인질로 잡혔는데, 알파부대의 진압 작전으로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현대가 감사의 표시로 이들 알파부대원들을 방한 초청했다. 우리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러시아 정보기관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현대가 제공한 차량으로 전국을 순회 관광했다.

나는 이들을 데리고 과천에 있는 경찰 대테러 진압부대를 방문하여 시범도 보여 주기도 하고, 용인에 있는 특전사 훈련장에 데리고 가서 합동 시범도 했다. 그들은 우리의 대테러 부대와 특전사 병사들의 시범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이었다. 입국 시에 보니 이들은 한결 같이 엄청나게 무거운 가방을 하나씩 들고 들어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보드카를 한 가방씩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아마 한국에서 술이 비쌀 것이라고 짐작하고 자기들이 마실 거리를 자체 조달해 온 모양이었다.

이들은 이동할 때마다 보드카를 한 컵씩 들이켰다. 그것도 무지 큰 컵으로 마셨다. 이들은 마치 습관처럼 차에 오를 때마다 한 잔씩 들이 부었다. 문제는 자기들만 마시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나에게도 강권하는 것이었다. 술 문화는 그네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술잔을 건네며 우정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이들과 다니면서 독한 보드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정보협력과의 장점은 여기저기 다녀 볼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외국 손님을 접대한답시고 전국을 돌아 다녔다. 그 중에서도 경주에는 여러 차례 갔었는데, 갈 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 사실 나는 경주가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경주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외부세계를 경험했던 도회지였다. 작은 집이 그 곳에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화랑의 집이란 곳에서 며칠간 수련하느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경주는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있었다. 도시 전체가 잘 다듬어지고 관리된 문화재와 같았다. 언젠가 벨기에 정보부 차장을 데리고 보문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쪽샘거리인가 하는 곳에 있던 어느 음식점에서 -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 안 나지만 - 전통 음식을 먹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콩잎 삭힌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나물반찬이 여간 정갈하고 맛깔스런 게 아니었다.

그곳을 들러 본 후에 경상도 음식도 먹을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파부대를 인솔하고 경주에 들렀을 때는 동행하던 서울 주재 러시아 정보기관의 파견관이, “경주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며 가자고 강권했다. 나도 어릴 적에 경주에서 만두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물어 물어 어느 만두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예전에 먹던 만두 맛은 아니었다.


그후 이 술집은,  “김현철과 그 아이들김홍업과  친구들이 단골로 놀던 집으로 알려지면서 일약 유명세를 탔다. 최근에 문을 닫았다는 보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