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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6. 해외공작국에서

28. 카일라일의 추억

나는 여러 군데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그 중에서도 펜실바니아 주의 카일라일(Carlisle) 이라는 소도시에 있는 디킨슨 법과대학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었다등록금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시골에 위치해 있는 점이 좋았다

애팔레치안 산맥 안의 시골 벽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아마 1년 간은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나중에 현지에 도착해서 보니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그 시골 구석에도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이제는 미국의 어느 시골 벽지에도 한국 사람이 없는 동네는 없는 것 같다.

카일라일은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다사람들은 더 없이 친절했다마을 전체가 가로수에 푹 파묻힌 듯수백 년 된 가로수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1] 법원과 교회와 참전용사 기념비가 마을의 상징인 것처럼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담벼락도 없는 고색창연한 대학 캠퍼스가 마을 안에 있었다시냇가에는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우글우글했지만 아무도 잡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달력에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 그대로 있었다여름날 초저녁이면 무수한 반딧불이의 향연이 꿈결처럼 황홀하게 피어났다겨울철에는 눈 덮인 들판의 언덕이 아련히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연수 갔다 돌아온 동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누구나 한결같이 자기가 연수 갔던 곳이 제일 좋은 곳이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물론 나도, “카일라일이 최고였다고 생각한다조금 살을 붙여 거창하게, “나는 카일라일이란 시골 마을에서 미국의 위대한 모습을 보았다고까지 말한다.

실제로카일라일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화석처럼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선거 날 투표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나는 미국식 절차적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실감했다그들의 선거는 조용하고 차분했지만모든 절차가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나는 이 시골 마을의 도서관에 가보고선미국의 세계 지배가 당분간 지속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시골 마을의 도서관의 장서가 얼마나 많은지우리나라의 큰 도회지의 도서관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카일라일만 그런 게 아니라미국은 어딜 가나 마을마다 그럴 듯한 도서관이 있었다도서관끼리 전산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어디서나 필요한 책을 빌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의 유치원에서 초 중등학교의 교육 시스템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여기선촌지라는 게 발붙일 수 없는 곳이었다.[3] 촌지가 없어도 선생님들의 열성과 책임감은 놀라울 정도였다왕따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외국 학생에게 쏟아 붓는 애정과 관심에 황송할 따름이었다교육예산의 씀씀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한 명의 지체 장애아를 돌보기 위해 서너 명의 교사가 달라 붙어서 교육하는 게 예사였다.[4] 이들의 등하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버스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카일라일은 전형적인 학원 도시였다이 동네에 있는 디킨슨 칼리지는특출하지는 않지만그래도 그 지역에서는 괜찮은 명문 사립대였다디킨슨 칼리지 한 귀퉁이에 디킨슨 법과 대학원이 있었다디킨슨 법대는 – 자기들 주장으로는 - 미국의 법과 대학원 중에 일곱 번 째 설립된 유서 깊은 법대라고 했다이 학교는 시골 구석에 있어서 교세가 날로 줄어 들고 있었는데내가 유학간 그 해에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에 편입되었다.

카일라일에는 미군의 육군대학(Army War College)도 있었다미 육군의 영관급 장교가 장성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이 학교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우리나라의 육군대학 같은 곳이었다우리 육군에서도 매년 대령 한 명을 이 학교에서 연수시킨다.

미국의 법과대학 대학원 과정을 따라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수업시간에 교수님의 강의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학생들이 질문하는 내용은 더군다나 들리지 않았다속사포처럼 얘기하는데다 말소리마저 작았기 때문이었다나의 영어 수준이 “밥 먹는” 수준은 되었지만, “밥 벌어 먹는” 수준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첫 학기는 수업을 따라가느라 정신 없이 보냈다두 번째 학기엔, ‘이러다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차피 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그저 미국 법대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맛만 보면 될 일이었다학점 잘 받는 것은 포기하고 운동과 여행으로 관심을 돌렸다짧은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연수 중에 IMF 사태가 터져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했던 것이 약간 아쉬운 점이었다.

일년 간의 연수 기간을 통해나는 한미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미군 부대에서 본 미국의 모습과 미국 현지에서 본 모습은 또 달랐다한국에서는 미국인들을 “나태하고 뚱뚱하고 거만하고 비겁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직접 와서 겪어 보니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학기가 시작하기 전 학교 기숙사에 임시로 거처하는 동안 켈리 교수님이란 분을 소개받았다그는 이미 정년 퇴임한 교수였는데소일 삼아 계속 학교에 나오고 있었다그는 아이리쉬(아일랜드 출신)계였는데자신이 한미 간의 한미행정협정(SOFA)을 체결할 당시미국 측 책임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소파협정을 만든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변호사 자격증도 보여주었다외국인이 한국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그가 유일한 예가 아닌가 생각되었다나는 미군부대에서 한미행정협정 관련 일을 해본 적이 있어 평소 관심이 있었는데이를 직접 만든 장본인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한국과의 인연 때문인지아니면 천성이 그렇기 때문이었는지나에게 특별히 잘해 주었다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소장하고 있던 60년대 한국 레코드 판을 보여주기도 했다정훈희라는 가수의 레코드도 있었는데그는 강 건너 불빛인가 하는 노래를 직접 흥얼거리기까지 했다그의 집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조그만 동종도 있었다.

 한 번은 켈리 교수가 나를 남북전쟁 재현 행사에 데리고 갔다미국에서는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회비도 내고 소식지도 발행하며해마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모여서 편을 갈라 실제로 전투 장면을 재현한다.

 우리는 안티탐 전투가 벌어졌던 매릴랜드 주의 해거스타운 근처의 벌판에서 며칠간 야영을 했다안티탐은 게티스버그에서 남쪽으로 3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다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이 북군에게 기울어지는 전환점이 된 전투였고안티탐 전투는 북군이 처음으로 대승하여 남북전쟁 최대의 분수령이 되었던 전투였다.

재현행사 현장에는 미국 전역에서 수천 명의 자원 병사들이 모여 들었다모두들 남북전쟁 당시의 전투복을 착용하고 당시의 무기였던 개스킷을 들고 나왔다물론 안전상 탄환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실제인 것처럼 화약은 장전했다신기하게도 이들은 이미 소속 부대와 계급까지 정해져 있었다자녀들에게 산 역사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인지 아예 가족을 동반하고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어디서 구해왔는지 수많은 군마와 수십 문의 옛날 대포도 동원되었다.

전투가 재현되는 현장에는 수만 명의 관객들이 모여 들었다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행사가 시작되자 몇 시간 동안 자욱한 포연이 이는 가운데 일진일퇴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나는 일찌감치 총에 맞아 죽은 시늉을 하고 들판에 드러누워서 이들의 전쟁놀이를 감상했다.

미국에서는특히 미국의 시골에서는재향군인회가 가장 영향력이 있는 단체라고들 하는데이들을 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갔다이들의 역사의식이 부러울 뿐이었다우리의 현실도 함께 떠올랐다.[5] 과거를 뒤돌아 보지 않는 민족에겐 미래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기간 중에 정권이 바뀌었다야당이 승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인 권력 교체가 이루어졌다때마침 나라의 경제가 부도가 나서 IMF 관리체제로 넘어갔다나는 새로 들어선 정권이 잘해 주기를 먼 곳에서 기원했다새로 정권을 잡은 분들이 자신들이 핍박받았던 경험을 잘 살려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루어 내기를 간절히 바랬다망가진 경제를 조속히 회복하여 난국을 수습해 주길 기대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98 6나는 미국 현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행사에 보안지원 요원으로 차출되었다덕분에 법과대학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대통령의 근접 경호는 경호실에서 담당하고우리는 원거리에서 경호정보 지원활동을 했다나는 뉴욕의 성 패트릭 성당 부근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김 대통령 내외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었다그때까지만 하더라도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게 있었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펜실바니아 주에는 나무가 많다. 실바니아라는 말이 이란 뜻이다. 펜실바니아는 펜의 숲이란 말이다. 영국 왕이 펜 씨에게 수풀 덮인 땅을 하사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가 많다. 특히 이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미국 사회에 대한 나의 인상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요즘 미국은 볼수록 실망스럽고 겪을수록 한탄스런 나라가 되고만 느낌이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미국에게 배울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본 카일라일은 한때나마 위대했던 유산의 한 자락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미국에서 50불 이상의 촌지는 뇌물로 취급된다. 미국의 공조직은 아직 부패되지 않았다. 이 점도 미국의 세계 지배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미국에 연수 가려는 후배들에게, 나는 도시로 가지 말고 시골로 가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시골에는 아직 미국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서울이나 뉴욕이나 그게 그거다. 배울 게 없다. 연수지를 선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인은, 미국이라고 다 같은 미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보면 그냥 미국이지만, 그게 아니다. 미국은 큰 나라이다. 하나의 대륙이다. 남과 북, 동과 서에 따라 기후도 천양지차이지만, 분위기도 천차만별이다. 도시 다르고 농촌 다르다. 같은 농촌이라도 지역에 따라 문화가 확연히 다르다. 차를 타고 20분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공부할 요량이면 동북 지역으로 가는 게 좋고, 적당히 쉬러 갈 요량이면 남서 지역으로 가는 게 낫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다면, 어디든 도시보다는 농촌이 낫다. 생활비 차이가 많이 난다.

이에 비해 우리는 불과 50여 년 전의 전쟁도 되돌아 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군대 시절 왜관의 다부동 전적지를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한 데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