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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6. 해외공작국에서

25. ‘썅캐’의 세계

95 2월 어느 날, 나는 해외공작국의 이병О 행정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아주과에서 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해외공작국 아주과는 젊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우선 과의 분위기가 괜찮았고 업무량도 적당했다. 다른 과에 비해 해외 파견관으로 나갈 기회가 일찍 찾아 오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해외공작국의 핵심과는 북미과였다. 하지만, 나는 공작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북미과는 과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라, 아예 처음부터 북미과로 갈 마음은 없었다. 후에 실지로 해외공작국에 가서 살펴 보니, “북미과에 안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거긴 업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의 분위기도 살벌했다.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지, 북미과 직원들은 하루 종일 책상에 고개를 쳐 박고 살았다. 사무실 내에서 과원들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나는 내심 정보협력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교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기 때문에 해외공작국의 업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당시는 기존의 해외 정보수집 방식에서 탈피해서 외국 정보기관과 정보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이병О 과장에게, “정보협력과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해외공작국의 정영철 국장에게 정식으로 전입 신고를 하러 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니가 김기삼이냐?”라고 말했다. 첫 인사치고는 뉘앙스가 좀 묘했다. 아마오정소 실장의 직접 부탁으로 전입해 온 녀석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너였구나!’라는 투였다.

당시 안기부 내에서는 고대 삼인방이 이른바 실세였다. 오정소, 정영철, 남영식 실장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각각 국내와 해외, 그리고 대북 수집 부서의 부서장들이었다. 이들이 국정원의 핵심 꽃보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들은 연배도 비슷한 데다, 젊은 시절부터 해외공작국에서 동고동락했던 친구 사이라 서로 잘 어울리고 협조도 잘 했다. “밀어주고 끌어주는고대정신(?)에도 충일한 사람들이었다.

오 실장은 그 후 국내 차장으로 먼저 승진했고, 남 실장은 황장엽 선생의 망명을 막후에서 직접 지휘한 공로를 인정 받아 차장급인 특보로 승진했다. 정영철 국장은 차장으로 승진하지는 못했지만, 정권이 바뀌고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살아 남았다.

해외공작국 정보협력과는 신ОО이란 분이 과장이었다. 신 과장은 나의 국정원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나를 자상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정협3계에 배속되었다.

내가 처음 맡은 일은 해외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주로 외국 정보기관에 제공할 정보협력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과, 외국 정보기관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통역업무를 조정하는 일이었다. 정협 3계에는 외대 통역대학원 출신의 전문 통역사들이 여러 명 있었다. 나는 이들 전문직 직원들의 번역과 통역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또한 일주일마다 타국 정보기관과 교류한 정보협력 실적을 종합하여 실장에게 보고하는 일도 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각 과에 연락하여 한 주 간의 정보협력 실적을 파악하였다. 이런 일을 통해, 외국 정보기관과 무엇을 어떻게 협력하고 어떤 자료를 주고받는 지를 전체적으로 대충 조감할 수 있었다. 안기부와 외국 정보기관과의 관계가 대충 눈에 들어왔다.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 조금 외람스럽긴 하지만, 정협과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소개하는 게 좋을 듯하다. 국정원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이들이 어떤 인간관계를 맺는지 좀 설명할 필요가 있는 듯 하다.

신 과장은 경복고, 서울대 언어학과 출신으로 영어를 특히 잘 했다. 유학이 아니라 국내에서 배운 영어를, 우리끼리는 된장영어라고 불렀다. 안기부 역사상 된장영어로 가장 유명했던 분은 이동복 특보와 현홍주 차장이었다. 나는 이동복 특보를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영어를 잘 했는지 모른다. 들리는 말로는, 외신 기자들에게 영어로 브리핑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특보는 특히 어려운 단어와 표현들만 골라 써서 조금 현학적으로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현홍주 전 미 대사가 영어로 대담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대학시절 AFKN을 통해 ABC 방송의 심야 대담프로인 『나이트라인』을 즐겨 보았는데, 언젠가 전두환 정권의 말년 즈음에, 현 대사와 민주당의 박실 의원이 그 프로에 참여하여 토론한 적이 있었다.

당시 집권여당의 상황이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 대사는 유창하고 거침 없는 영어로 유연하게 변명해 나갔다. 반면에, 박실 의원은 한참이나 유리한 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버벅거리며 공격의 포인트를 잡지 못했다. 현 대사의 완벽한 한판승이었다.

신 과장의 영어실력이 이들 전설적인 선배들에게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영어는 쉬우면서도 깔끔하고 품위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어 실력이 부산에서 중학교 다닐 때 배운 게 전부라고 늘 겸손해 했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후배들에게는 자신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우리말 보고서도 빼어나게 잘 썼다. 우리가 올린 보고서의 초안이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기가 막히게 잘 된 보고서로 변해서 나오곤 했다. 우리는 그를, “신의 손이라고 불렀다. 그 만큼 그가 우리들의 초안 보고서를 잘 손질해 줬다는 말이었다.

신 과장은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 일했다고 한다. 5공 때 청와대의 영문자료는 모두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에 근무할 때 안기부 간부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5공 시절에는 안기부의 과장급 간부에게도 관용차가 지급되고 직접 청와대에 들어가 보고도 하고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자원하여 안기부로 옮겨 왔다. 그는 아무런 인맥도 연고도 없었지만 실력 하나로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다. 

당시 정협과 1계장은, 내가 노벨상 공작에 관한 글에서 밝힌 박경О 씨였다. 그는 본래 외사국 출신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도미니카에 파견관을 나갔다가 귀국한 후 정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정협과 1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미 CIA 한국지부와 정보협력 업무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당시 박경О 계장은 CIA와 모든 정보협력을 관장해야 할 직책에 앉아 있었는데, 능력이 안돼서인지 아니면 성의가 없어서인지,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관 밑에서 일하는 게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그는 하루 종일 영자신문의 간지를 보며 소일했다.

그래서, CIA와의 정보협력 업무는 박 계장 대신, 7급 직원에 불과했던 박지О 직원이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정영철 국장은 박 계장이 자기의 고대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일도 열심히 않는 데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신 과장은 그런 박 계장을 과장으로 진급시키기 위해 애를 써 주었다. 신 과장의 후원 덕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박 계장은 막차로 간신히 지원조정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때로는 사람의 운명이란 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난 98, 정권이 바뀌자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신 단장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내쫓듯이 그를 UN 공사로 내보냈다.

마침 박경О 과장도 뉴욕 참사로 발령이 났다. 직급상 엄연히 신 공사가 상관이고 박 참사는 아랫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직급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확인한 얘기는 아니지만 들은 대로 말하면, 박 참사는 신 공사에게,“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죽은 듯이 지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실세이니,“설치지 말고 알아서 처신하라는 경고였던 셈이다. 권력의 비정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박경О 참사는 워싱턴으로 옮기더니, 999월경 갑자기 단장으로 승진해 본부로 들어 왔다. 그는 2001 4, 노벨상 공작을 성공시킨 후 국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승진은 계급 연한조차 채우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이스라엘 대사로 나갔다. 

박경О 계장의 후임으로 정협과 1 계장으로 온 분은 김용О 계장이었다. 신 과장이 단장으로 진급한 후 그는 후임 정보협력과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이 분은 계속 신 과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신 공사에 이어 워싱턴 공사를 지냈다. 내가 이 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외람된 일이지만, 이 분의 인품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흔히 해외공작국 요원들은 스스로를 비하하여 썅캐라고 불렀다. 아마도,“상놈의 개새끼라는 말의 줄임말일 것이다. 평생 남의 뒷통수나 치면서 험하게 살다 보니, 그런 자조적인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정보관이란 게 원래 그런 속성이 있다. 남의 잘하는 짓은 보고할 만한 게 없고, 매일 남 잘못하는 것만 찾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해외공작국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인격이 꼬이고, 비틀어져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평생 남의 뒷꽁무니나 캐고 다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변하는가 보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 계장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이런 험악한 여건에서도 온전한 인격을 보존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해외공작국장을 지냈다가, 그 후 아시아 어느 나라의 대사로 나가 있다.

박경О 씨의 출신 배경과 노벨상 공작에서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서는, 1부 양심선언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참조. 

박경О씨의 이례적인 진급은 문민정권의 오정소 차장의 진급만큼이나 파격적인 것으로, 언젠가 시사저널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1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