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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4. 문민정권의 뒤안길 I

15. “같이 좀 못하자”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며칠 휴가를 보낸 뒤, 나는 94 1월 초부터 소위 남산으로 출근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로 알려진 남산이었지만, 나는 거저 무덤덤한 기분이었다. 당시 남산에는 국내 정보부서뿐만 아니라, 대공수사와 외사방첩 부서, 그리고 감찰실 등 안기부의 핵심 부서가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국내정보 수집부서인 대공정책실로 발령이 났다.

우선 대공정책실이라는 명칭부터 좀 설명하는 게 좋겠다. 대체로 국정원의 여러 부서의 명칭은 그 부서의 실제 업무 성격과 거리가 있다. 굳이 위장명칭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대정실은 명칭대로라면 간첩을 잡기 위해 정책을 세운다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어야 제격이겠는데, 실제로는 국내 정치정보 수집 부서였다.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서울분실이라고도 불렸던 모양이다. 수도 서울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공정책실은, 남산의 다른 부서와는 조금 떨어져, 소월길을 올라가다 왼편으로 리라초등학교 바로 아래에 있었다. 대공정책실 청사는 아마도 예전에 국토통일원으로 쓰인 건물이었던지, 그 때까지도 국토통일원이란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힘차게 잘 쓰여진 붓글씨였다.

 

나는 윤성О라는 동기 한 명과 함께 신문과에 배치되었다. 국내정보반에서 함께 교육 받았던 나머지 13명은 모두 국내정보 분석부서인 기획판단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신문과의 이양О 기획관이 정보학교까지 직접 찾아와 우리 둘을 선발했다고 한다. 이런 일은 흔히 있던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80년대 말부터 진행된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어, 언론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정보기관이 예전처럼 언론을 조질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협조를 받아 내기도 점차 힘들어 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언론여건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학벌이라도 받쳐주는 직원을 언론 수집관으로 차출하려다 보니, 우리 둘이 불려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서울법대 출신이었고, 같이 간 동기는 경기고와 고려대 출신이었다.

이 기획관은 80년대부터 오랜 동안 조선일보 담당관을 지낸 탓에, 조선일보라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일보는 서울법대 출신이 아니고는 접근이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아마 조선일보 편집진에 유독 서울 법대 출신이 많아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신문과에 발령 받기 전부터, 나는 이 기획관에 의해, 장차 조선일보 담당관으로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신문과에 배치 받아 인사 갔을 때 과 선배들은, “언론고시를 쳐서 조선일보에나 들어갈 것이지, 여긴 뭐 하러 들어 왔냐?”며 농담으로 핀잔을 줬다. 나는, “아무렴 일국의 정보기관이 일 개 신문사보다야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라며 웃으면서 받아 넘겼다.

 

처음 일주일은 적응(오리엔테이션) 기간으로 각 과를 돌며 인사를 했다. 나는 하루에 한 과씩 순례하면서 대정실 요원들의 안면을 익혔다. 첫 날 정치과를 방문하니 강욱О 선수가 육중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특별한 방식으로(?) 애정을 표시해 줬다. 그는 우리들에게, “앉았다, 섰다를 시키는가 하면, 코를 잡아 당기기도 했다. 마치 군대에서 새로 전입해 온 신병들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았다.

다음날 학원과에서는 한양대를 담당하시던 조광О 선배님 등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입사 1년 선배인 금장О 선배가 우리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사회과에서는 조성О, 김남О 등 젊은 직원들이 우리를 서울역 시위 현장으로 데리고 나가 현장실습을 시켜주었다. 종교과에서는 먼저 입사해 일하고 있던 고등학교 후배를 만났다.

나는 이렇게 대정실 전체 10여 개 과를 돌았다. 나는 평소 안기부 수집관이라면 굉장한 사람들일 거라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막상 만나 보니 별달리 특별한 점이 없었다. 모두가 그저 평범한 공무원들처럼 보였다. 조금은 의외였고, 어찌 생각하면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생각으로는 정보기관이란 곳을 너무 과대 평가할 필요가 없는 게로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기관을 너무 얕잡아 봐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의 행색에서 촌티가 가시지 않았던 탓인지 사람들은 나를 고대 출신으로, 같이 갔던 다른 동기를 서울대 출신으로 착각하곤 했다.

 

나는 신문과 기획반에 배속되었다. 기획반은 팀장인 기획관을 중심으로 2-3명의 기획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획반은 과의 컨트롤 타워 같은 곳이었다. 그 곳에서 행정과 기획을 담당했다. 기획반은 수집관들로부터 각자 일일 수집계획를 파악하기도 하고, 상부에 보고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기획반의 가장 말단 직원을 행정관이라고 불리는데, 행정관은 과의 모든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직원이었다. 행정관은 자질구레한 행정사항을 모두 챙겨야 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의 개인 비서 노릇도 해야 했기 때문에 고달픈 직책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정보기관에 들어와서 1년간 고된 훈련을 마치고 막상 실무에 투입되었는데, 고작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났다. 그래서, 각 과의 행정관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저녁 나절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 한 대를 나눠 피면서 서로의 애환을 나누곤 했다.

신문과장은 이장О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덩치에 비해 좀 좀스런 데가 있었다. 그는 행정관을 혹사시키는 스타일이었다. 전임 행정관인 윤점О 선배는,“과장의 집 전기료를 대납해 주러 은행 심부름을 가기도 했고, 심지어는 과장 딸의 교과서도 대신 타다 주기도 했다며 툴툴거렸다. 그는 행정관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였던지 우리를 무척 반기는 듯 했다. 

 나는 신문과에 빠르게 적응했다. 다른 신입 사원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겸손히 배우려고 노력했다. 매일 일찍 출근하여 사무실 걸레질부터 했다. 당시까지도 대정실 청사 사무실 바닥은 대걸레로 청소해야 했다. 선배들과도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선배라고 해봐야 비슷한 또래였다.

나의 직속 상관이었던 이양О 기획관은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까탈스런 분이었는데, 웬일인지 나에게는 특별히 잘해 주었다. 아마 자신이 직접 골라온 직원이라 그랬을 것이다. 나에게는 칭찬도 인색하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과의 벽시계를 고쳐 놓았더니, “시계가 틀려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는데, 새로 전입해 온 직원이 바로 고쳐 놓았다, 공개적으로 나를 칭찬했다. 그 때부터 나는 졸지에 기획관의 최측근으로 분류되었다.

이 기획관은 내가 부속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와, 후에 대정실을 떠났을 때 많이 아쉬워했다. 내가 외국으로 연수 나간다고 인사 갔을 때에도 특별히 불러 전별금 봉투를 건네 주기도 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훌륭한 조선일보 담당 후계자(?)로 키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같이 배치 받았던 동기가, “할 얘기가 있다, “복도에서 좀 보자고 했다. 그는 대뜸 나에게, “너가 사무실에서 너무 잘하는 바람에 내가 상대적으로 못하는 것으로 비쳐져 불편하다며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차라리 같이 좀 못하자. 선배들에게도 깍듯이 할 게 아니라, 적당히 말도 놓고 쉽게 지내자고 제안해 왔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조금 황당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입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때문에 시기를 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동기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는지 반성해 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때, ‘정보기관이란 곳에는 가치가 전도된 사람들이 들어 오는 곳이로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 동기는 그 후 이종찬 원장 시절, 한국화약을 담당하는 수집관으로 활동했는데, 돈 문제로 인해 면직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집권당의 당직을 맡고 있는 경기고 출신 모 선배에게 긴급히 구명을 요청한 덕에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한참 후에 그가 퇴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나라를 위해서도 그 자신을 위해서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신문과에 발령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시 미 CIA 국장의 방한 사실이 한겨레신문에 보도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1] 극비로 방한한 우방국 정보기관장의 동선이 노출되었으니 커다란 보안사고가 터진 것이다. 한겨레의 사회부 기자들은 울시 국장의 방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국방부 청사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행사진행 요원들이 가까이서 찍은 필림은 압수했지만,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은 뺏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감찰실은 어디서 보안이 새 나갔는지 파악하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유출자를 찾아 내지는 못했다. 아마추어 청와대에서 누설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문민정부에서는 이러한 보안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 점에서는 참여정부의 행태와 많이 닮았다. 보안사고는 준비 안 된 아마추어들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 때 특종을 주도한 한겨레 사회부의 이 모 기자는, 그 후 노무현 정권에서는 기자협회 회장이 되었다.

한겨레신문 사회부는 문민정부 내내 정권을 꽤나 괴롭혔다. 그들은 팀을 조직하여 김현철을 파파라치처럼 집요하게 따라 다녔다. 한겨레는 김현철이 고려대에 편입하기 전, 한성대에 다닌 사실을 취재하여 보도할 시점을 저울질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김현철 관련 정보가 가장 민감했다.

 

한겨레의 특종으로 물먹은여타 신문들이 후속 취재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의 박 모 기자가 러시아의 해외 정보기관(SVR)의 프리마코프 국장이 93년 말에 방한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특종 보도했다. 알고 보니 박 기자는 나와 동년배로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이었다. 서양 속담에, “남의 집 마당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하더니, 그 때 내 꼴이 좀 그랬다. 특종 기자가 부러운 건 아니었지만, 정보기관에 들어와 허드레 일이나 하고 있는 내 처지가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간 직후, 또 다른 신문은 한발 더 나아가,“, , 3국의 정보기관장이 서울에서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고 썼다. 이 기사는 너무 오버한 것이었다. 순전히 추측에 근거한 소설이었다. 언론사간의 과다 경쟁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우리 나라 언론의 현주소랄까,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2]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1]  한겨레 신문 1994.1.21. 1면 사진 기사 참조.


[2] 조선일보 94.1.22 , 러 최고정보책임자 잇단 극비 방한 주목제하 기사 및 세계일보 94.1.22 , , 러 정보책임자 극비 회동제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