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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4. 문민정권의 뒤안길 I

18. ‘쉰’ TK vs. ‘신’ TK

보좌관과 보좌원간의 업무분장이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실장과 부실장의 개인적인 심부름이나 비공식적인 잡무도 모두 내 차지였다. 대체로 이 보좌관이 주로 오 실장을 챙기는 데 비해, 보좌원인 나는 세 명의 부실장을 챙겼다.. 1 부실장은 임경О 단장이었는데, 그는 정치, 학원, 종교 분야를 담당했다. 임 단장은 김기섭 기조실장의 대구 영남고 후배였다. 그 후, 그는 오 실장이 차장으로 승진되자, 대공정책실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 우스개 소리로 “TK도 여러 가지라는 말이 돌았다. 이른바 『신TK』와 『쉰TK』가 있다고 했다. 구정권에서 잘 나가던 TK 인사들은 쉰TK라고 불렸고, 신정권에서 새로 부상한 TK 인사들을 신TK라고 불렸다. 안기부 내에서는 영남고 출신들이 대표적으로 신TK로 분류되었다. 김기섭 실장과 임 단장이 영남고 출신이었다. 핵심 보직인 감찰과장을 지냈던 이순О 과장도 영남고 출신이었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해임되자 『국강투』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검찰에서 홍준표 특보가 파견되어 왔는데, 그도 영남고 출신이었다. 홍 검사는 박철언 씨와 이건개 씨를 조사한 탓에 검찰 내에서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안기부로 파견되어 나온 것도 김기섭 기조실장과의 인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정형근 씨가 영입해 왔다는 말도 있었다. 홍 검사는 안기부 재직 시절 여러 가지 튀는 행동을 많이 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조직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아 보였다. 소신이 너무 강해 보였다. 팀워크보다는 단독 플레이에 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에 비해, 당시 쉰TK의 대표적인 인사가 박철언 씨나 박준규 씨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대부분 감옥으로 갔거나, 집에서 쉬었다. 박철언 씨는 노태우 정권에서 소위 황태자라 불리면서, 월계수회를 조직하는 등, 정권의 2인자로서 한창 잘 나갔던 사람이었다.

박철언 씨는 “LP”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Little Prince인지 Little Park인지 아니면 Little President인지 어쨌던 그는 그렇게 불렸다. 나는 우연히 이 LP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아마 홍준표 검사가 작성한 수사보고서였던 것 같다. 그 보고서에는 박철언 씨가 빠징고 업자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던 정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박철언 씨의 비리혐의를 찾고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 그에 대한 첩보가 심심찮게 올라왔다. 대부분 난잡한 사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 첩보 가운데 재미난 것도 있었다. 어느 첩보에 의하면, “LP는 여성의 아랫 거웃을 수집하는 고상한(?) 취미가 있는데, 어느 날 룸살롱에서 같이 놀던 모 제약회사 며느리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가, 그 여자로부터 뺨을 얻어 맞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 다른 첩보에서는, “LP는 꽃값에 인색하여 여대생들로부터 째째하다고 욕을 먹는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어느 첩보 중에서는,“감옥에서 나가면 두 사람은 반드시 손을 본다고 언급한 내용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강 모와 이 모씨라고 했다. 강 모씨는 그 후 한나라당의 최고 중진이 된 사람이고, 이 모씨는 문민정권에서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인사다. 아마 그들 간에는 우리 범인들이 알지 못하는 무슨 사연과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박철언 씨의 아내인 현 모씨에 관한 첩보도 심심찮게 보고되었다. 후에 그녀는 남편을 대신하여 대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현 씨에 대한 첩보는 주로 맞바람을 피운다 3류 첩보가 주류를 이루었다. 수영 강사와 테니스 코치가 등장하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양아치 정보들이었다.

이건개 씨에 관해서도 비슷한 류의 첩보가 올라 왔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어느 첩보에 의하면, “이건개 씨는 화류계에서 이건 개’(This is a Dog)로 통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또 다른 첩보에서는, 그가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대조류였던, “폰섹을 탐닉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음해인지 모를 일이었다. 

부속실에서 나는 주로 임 단장의 보좌관 역할을 했다. 그의 사소한 개인 심부름도 자주 했다. 좀 짜증나는 일이긴 했지만, 가끔 은행에 가서 미국에 유학 중인 그의 아들에게 생활비를 부쳐주는 심부름도 했다. 임 단장의 심부름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은, 김현철에 관련된 첩보를 친전 봉투에 넣어 김기섭 기조실장에게 전달해 주는 일이었다. 문민정권 초기에는 김현철 씨의 신상 관련 첩보는 김기섭 실장이 관장했기 때문이었다.

김기섭씨는 신라호텔 상무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정보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보다. 상도동이 정권을 잡고 난 후, 아마추어 측근들이 어떻하든지 청와대에 들어가려고 박 터지게 다툴 때, 그는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를 자원해 경쟁 없이 무혈 입성했다고 한다.

그는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매일 새벽 5시경 출근하여 청사를 한 바퀴 돈 후, 하루 업무를 시작하곤 했다. 그는 나름대로 안기부가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김현철의 최측근으로 행세하면서 물의를 빚었지만, 어찌 보면 동정심이 들기도 한다 

2 부실장은 이근О 단장으로 경제와 사회 분야를 담당했다. 이 분은 어떻게 단장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도 소신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랫사람으로서 성심껏 그를 모셨다. 한참 후에 이 단장이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갔더니, “다른 사람들은 날 아무렇게나 대하는 데, 너는 좀 다르구나라고 말했다. 내가 성의에 고마움을 표시한 말이었다.

이 단장의 방에는 진ОО, 최ОО 같은 고참 직원들이 하루 종일 죽치고 노닥거리기 일쑤였다. 진 씨는 별명이 『진도깨비』였는데, 아마 젊은 시절엔 국내외 부서를 오가며 한가락 했던 것 같았다. 그는 오 실장의 경복고 선배였기 때문에 아무리 땡땡이를 쳐도 오 실장도 어찌하지 못했다.

최 모 씨는 안기부 최고의 한량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주색잡기에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일약 감사관으로 승진하여 거들먹거리더니 급기야 보안 사고를 쳤다. 그는 이른바 남촌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정보기관이란 데가 사람을 잘 뽑아야 되는 곳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3 부실장은 이강О 단장이란 분이었는데, 그는 언론을 총괄했다. 3 부실장은 언론을 조정하는 협력단장을 겸했다. 이 단장은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전혀 정보기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초인적으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내가 국정원에서 겪은 본 사람 가운데 이 단장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경우가 없었다. 매일 저녁 8시에 가판이 나오면 직접 꼼꼼히 챙겨 읽고, 문제 기사를 조정한 후에야 퇴근하곤 했다. 일이 터지면 12시를 넘기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고도 다음날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꼬박꼬박 출근했다. 오 실장은 그런 이 단장의 성실성을 높이 샀다. 그 후 그는 권영해 부장의 비서실장으로 영전했다.

그는 비서실장 시절, YS의 사생아 문제를 제기하여 물의를 빚었던 손 모 씨를 관리했던 모양이다. 이 단장이 언론 전문가이다 보니 그 일에 적임이었을 것이다. 지난 97년 대선 당시 손 씨는 『김대중 X 파일』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단장이 그 일에 어느 정도 연루되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뀐 후 이 단장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소문에 의하면 이 단장은, “발가벗긴 채 극심하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 수사국 친구에게, “어떻게 한솥밥 먹던 전직 간부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냐?”며 따진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이 단장은 그 후 국정원이 나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필자가 이러한 첩보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러한 첩보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다만, 정보기관이 수집하는 첩보의 범위와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국정원이 이런 양아치 첩보를 더 이상 수집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 책 제 9장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I, 295 페이지 관련 부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