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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4. 문민정권의 뒤안길 I

16. 새끼 보좌관

나의 신문과 생활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대공정책실 부속실 보좌원으로 불려 갔기 때문이다. 신문과에 배정된 지 한 달여가 지난 때, 인천지부장에서 새로 대정실장으로 부임한 오정소 실장이 나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나를 대공정책실 부속실의 보좌원으로 임명했다.

내가 보좌원으로 불려간 것은 일종의 행정착오의 성격이 있었다. 왜냐하면, 보좌원은 대개 부서에 배치된 지 1, 2년이 지나, 부서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 아는 직원 중에서 뽑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오정소 실장은 내가 부서에 배치 받은 지 1-2년 지난 된 직원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고려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나의 학력 등을 보고 대충 뽑았을 것이다.

신문과장은 내가 부속실로 불려가는 게 못마땅했던지, “오 실장과 무슨 사이냐? 어떻게 해서 부속실로 가게 됐느냐?”며 나에게 취조하듯 따져 물었다. 그러다, 내가 부속실로 인사 조치될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금새 태도를 바꿨다. 별안간 아부 모드로 돌변했다. 그 후 그는 부속실에 올 때마다 나에게보좌관님이라며 깍듯이 존칭어를 썼다. “보좌관에게 잘못 보이면 불편해 진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국내 부서의 국정원 직원들은 권력에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들은 권력의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먼저 엎드렸다가, 권력의 바람이 지나기 전에 먼저 일어선다. 서글픈 일이지만, 나는 국정원 간부들이 겨자씨만한 권력 앞에서도 비굴해지는 경향이 있음을 목격할 때가 많았다.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하다 보면 자연히 체질이 그렇게 바뀌나 보다. 아마도 일종의 직업병적인증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부속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세 없이 바쁜 곳이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생활이었다. 보좌원의 하루 일과는 실장이나 부실장의 잔심부름을 비롯한, 부속실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처리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7시경에 출근했다. 출근하자마자 실장실과 부실장실의 재떨이를 비우고, 손때 묻은 책상 위 유리부터 닦았다.

당직을 서는 선배들은, “보좌관이 왜 청소를 하느냐?”고 만류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직원이 아침부터 걸레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안스러워 보였던가 보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사무실에 들어올 수 없고, 여직원은 늦게 출근하니 우선은 내가 대충 청소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했다.

실장과 부실장은 대개 8시 전후에 출근했다. 이들이 출근하기 전에 간밤의 상황을 체크하고 보고서를 정리하는 일이 아침 나절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보고서 중에서 여러 사람에게 배포할 것은 복사도 해 놓아야 했다. 낮 시간 동안 나의 주 업무는 복사가 금지된 보고서를 회람시키는 일이었다. 모든 보고서는 원칙적으로 복사가 금지됐기 때문에 실장이 다 읽고 나면, 재빨리 세 명의 부실장들에게 회람시켰다. 특히, 일일보고서와 메모보고서를 회람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타 부서로부터 문서를 수발하거나, 우리 부서의 첩보보고서를 다른 부서로 전달하는 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수발해야 할 문서 이외에 비공식적으로 수발하는 문서의 심부름도 모두 내가 했다. 매주 금요일 경에는 박성도 정치과장 방에 가서 야매로 주례보고를 받아오기도 했다. 이른바 문서수발이 나의 주 임무였다.

보좌원은 부속실 내 모든 문서의 수발과 회람, 관리, 파기 등 전 과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대공정책실 부속실은 국내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정보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문건이 많았다. 일일보고서는 기판국에서 생산하여 매일 청와대에 보고하는 보고서였다. 메모보고서는 과학보안국에서 작성하여 대공정책실로 전송한 것을, 메모 보좌관이 필사한 보고서였다. 메모 보좌관은 하루 세 차례 보고했다. 미림보고서는 실장이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내가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대공정책실 부속실에는 모두 네 명이 근무했다. 나 이외에 보좌관과 여직원, 그리고 메모보좌관이 있었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울 때는 내가 보좌관 업무도 대신해야 했다. 보좌관은 이용О라는 선배였는데, 그는 기판국에서 분석업무를 하다 인천지부로 내려갔었는데, 거기서 오 실장을 만나 다시 대정실로 따라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는 오 실장의 고대 후배라 그런지, 오 실장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센스와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메모보좌관은 배충О이라는 분이었는데, 정치과 기획관을 하다가 옮겨 왔다. 메모보좌관을 거치면 대개 과장으로 진급시켜 부는 분위기였다. 그는 베테랑으로 정보원으로, 대한민국 정치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배 보좌관은 나에게 고마운 분이었다. 회사 생활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여러 가지 마음을 많이 써 주었다. 그는 지난번 미림 사건으로 인해 아마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본의 아니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지면을 빌려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부속실 업무 가운데 실장의 전화를 연결해 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전화를 연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전화를 연결하는 일은 섬세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전문직(?)이었다. 나는 한 동안 전화 교환수 노릇이,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전화 교환수의 자질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수화기를 들면 상대방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감각적으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 물론 나의 어눌한 언변도 이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한 번은 퇴근 직전에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어이라고 한마디 하고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즉각적인 사태파악이 안되어 조금 버벅댔는데, 그러다가 된 통 크게 깨졌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다름아닌 오 실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어떻게 내 목소리도 분간하지 못하냐?”며 야단을 쳤다.

전화를 연결해 주는 상대방의 권력관계에 따라 누구를 먼저 바꾸어 주어야 하는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물론 권력 순위가 낮은 당사자가 먼저 받도록 하는 게 노하우였다. 이 문제로 인해 전화 상대방의 보좌관과 머리 싸움하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권력 순위라는 게 단순히, “정부 직제상의 순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의 어려움과 복잡성을 더 했다. 때때로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중요한 상대방에게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집무실에서 몇 발자국을 옮길 것인가를 초 단위까지 계산했다가 연결버턴을 눌러야 하는 것도, 살 떨리는 스트레스였다. 한마디로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보좌원도 대개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혹자는 새끼보좌관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서 국내 정보담당 차장으로 재발탁되었다.

 메모 보고서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서는 제 1 거짓의 희극, 도청의 진실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