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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12. 공수와 해양 훈련 전반기 교육이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를 즈음에 산악훈련을 갔다. 나는 동기들이 먹을 쌀자루를 지고 북한산에 오르느라 땀깨나 흘렸다. 북한산과 도봉산 일원에서 야영하며 며칠을 지냈다.[1] 우리들은 산 속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낮에는 체력 단련을 하고, 야간에는 담력 훈련을 하기도 했다. 몸은 고되기는 했으나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었다. 비좁은 텐트 속에서 야영하다 보니 동기들끼리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끔 훈련 후에는 소주 한 잔으로 회포를 풀 때도 있었다. 북한산 위에서 서울의 야경을 보며 마시는 소주는 특별한 정취가 있었다. 밤이면 텐트 속에서 꾼들끼리 몰래 어울려 세븐오디 포커를 치기도 했다. 세븐오디가 우정을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스포츠라는 걸 알게 되었다. 훈육관은 이런 종.. 더보기
11. 정보학교의 생활 정규과정 교육은 그리 만만한 교육이 아니었다. 피교육생 신분이란 게 다 그렇지만, 머리가 굳어진 후 통제된 생활을 강요 당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간이나 하다 보면 지치고 진이 빠진다. 처음 몇 달간은 한겨울의 훈련이라 더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었지만, 그렇다고 지옥훈련 같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몇 주가 지나자 “퇴사하겠다”고 나서는 친구들이 생겼다. 제임스 본드를 꿈꾸고 들어왔는데, 막상 겪어 보니 논산훈련소에 재입소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퇴사하는 요원이 생겨 결원이 되면 금방 차순위 입소자가 그 자리를 메웠다. 나도 처음 세 달은 무척 견디기가 힘들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내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더보기
10. 03 정부의 정규 30기 1993년 1월 10일, 나는 안기부 정보학교에 입소했다.[1] 한 겨울이었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고, 정식으로 정보기관원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입사하기 전에도 인성검사다 뭐다 하며 몇 차례 드나 들긴 했지만, 막상 정식 요원이 되어 들어가니 기분이 달랐다. 청사 내에 줄지어 서 있던, 곧게 뻗은 소나무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보였다. 텅 빈 운동장에 누렇게 변색된 잔디가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당시엔 안기부 청사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다. 해외와 대북 정보를 담당하던 부서들은 이문동 청사 내에 있었다. 물론, 우리가 입소한 정보학교도 이문동에 있었다.[2] 이에 비해 국내 정보 부서와 대공수사, 외사보안 부서들은 남산 청사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편하게 이문동, 남산이라고 불렀.. 더보기
9. 학창시절 기억의 편린들 나는 1977년, 면 단위 중학교에 진학했다. 한 학년에 네 개 반이 있었다. 나로서는 갑자기 훨씬 큰 물로 나간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나는 수업 이외에 따로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대신 책은 조금 읽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교실 내에 학급문고라는 것이 들어온 후 투명인간, 해저이만리, 삼총사 같은 책들을 재미 있게 읽었다. 고전읽기라는 게 생긴 후에는, 신유복전이니 박씨전이니 하는 책을 읽고 읍내에 시험 치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좀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어느 일본 사람이 쓴 다섯 권짜리 삼국지는 여러 번이나 읽었다. 걸리버여행기, 로빈슨크루소우 등도 읽었다. 세계위인전이란 두꺼운 책도 읽었는데, 그 책 속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막사이사이.. 더보기
8. 어린 시절 추억의 단편들 나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문명의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았다. 아마도 나는 문명 이전의 마지막 세대에 속할 것 같다. 우리 마을엔 전기도 전화도 수도도 없었다. 나는 예습이란 말도 복습이란 말도 몰랐다. 학교 갔다 와서는 진흙탕 속이나 모래사장에서 뒹굴면서 자랐다. 바쁜 농사철이면 농사일도 도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 먹이고, 꼴 베고, 소죽 끓이는 일”은 내 차지였다. 당시 시골의 주요한 교통수단은 소달구지였다. 좀 지나 경운기라는 물건이 들어오면서 달구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아버지가 “대동 경운기”를 몰고 오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이웃 동네는 국도변에 위치해 있어 전기도 일찍 들어 왔지만, 우리 동네는 그렇지 못했다.. 더보기
7. 나의 가족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부모님 이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위로 형이 두 명 있고 누나와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우리 마을은 이름대로라면 크게 흥해야 마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명칭과 다르게 가난한 곳이었다. 당시 시골은 어디나 다 살기 어려웠지만, 우리 마을은 특히 오갈 데 없는 뜨내기들이 모여들던 곳이라서 더 가난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편이었다. 머슴을 한 사람 둘 정도는 되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지런히 농사 지어 저축하여 조금씩 땅을 늘린 덕분이었다. 덕택에 나는 어린 시절에 도시락을 못 사가 굶어 보았거나, 등록금을 못 내 야단맞은 적은 없었다. 물론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3.. 더보기
6. 충절의 고장에서 의열을 배우다 1964년 한가위를 며칠 앞 둔 어느날, 나는 경상남도 밀양의 어느 작은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자손이 귀한 집도 아닌데다. 한창 바쁠 시절에 세상에 나온 죄로, 나의 세상 데뷰는 그리 떠들썩한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황으로 볼때 나의 탄생은 그저 "없는 살림에 먹는 입(식구)하나 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고향은 밀양시 상남면 평촌리 대흥동이라는 곳이다. 대흥동은 일본식 명칭이다. 아마 우리 동네가 일제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1930년대 초, 일제는 대륙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이라는 것을 시행하고 전국의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했다. 낙동강 한 지류였던 남천강(밀양강)에도 제방.. 더보기
5. 국정원 입사를 결심하기까지 내가 정보기관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많은 주저함과 망설임이 있었다. 나도 오랫동안 정보기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보기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도,‘내가 위장취업을 하는 게 아닌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기도 했다. 경찰서에 들락거리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스스로 골수 문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이 나의 적성에 맞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흔히, “20대에 좌익에 빠지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아직 좌익에 빠져 있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20대에 한 때 깊이 좌경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접어 들면서 생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문득 깨달음이 있었는데,“현실 세계를 이념의 틀에 억.. 더보기
4. 미 8군 19지원사 법무감실 그 즈음 나는,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먼저 군대라도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한국군에 들어가면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카투사를 택했다. 나는 85년 말에 카투사 시험에 응시했다. 당시엔, “카시가 국가 5대 고시 중의 하나”라고 느스레를 떨었다. 물론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력고사 수준이었다.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86년 4월,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학우가 신림사거리에서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엔 대학생들이 전방에 입소하여 일주일간 교련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그들은, “양키의 용병교육을 거부한다”며 온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미군의 용병이 되어 .. 더보기
3. 이념의 바다에 빠지다 다시 재수시절 얘기로 돌아가자. 여름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현듯‘아무래도 대학에는 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그야말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부산으로 내려 갔다. 감만동에 살던 누님 댁에서 우선 여장을 풀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이미 진도도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시험까지는 약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특히 수학은 문제 유형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당시에 안성탕면이 처음 나왔는데, 독서실에서 끊여 먹던 그 라면 맛은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치른 83년 입시에서는 점수가 그런 대.. 더보기
2. 돌베개와 사상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의 청년시절과 대학생활에 대해 좀 소개하고 넘어 갔으면 한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정보기관이란 곳에 몸을 담게 된 동기를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청년시절 얘기부터 좀 하는 게 순서일 듯 하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 뒤돌아 보니, 지난 80년 대 나의 청년시절은 그야말로 폭풍노도의 시기이자 상실과 방황의 나날이었다. 1983년 봄, 나는 부산 서면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 전 해 겨울, 나는 서울대 사회대에 원서를 썼다가 아깝게 낙방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음 속에는 이미 입시 위주의 공부에 대한 회의감만 가득했다. ‘나름대로 하느라고 했는데 대학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라는 자괴감에 빠져, 마음이 많이 상했다. 사회에 대한 원초적인 반항심이 싹텄다. 그 해 .. 더보기
1. 정보기관과의 첫 만남 내가 정보기관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아마 1992년 어느 여름날 오후였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종로 5가 부근 어느 고층 건물의 – 지금은 그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지만 - 맨 꼭대기 층인 13층에 있던 안기부[1]의 물색팀 사무실로 내발로 직접 찾아 갔었다. 언젠가 나보다 먼저 안기부에 입사했던 대학 친구 ○국진이에게서 안기부의 물색팀 사무실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무실은 안기부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회사 바깥에서 운영하는 이른바 안가(안전가옥) 중의 하나 였다. 내가 처음 만난 안기부 직원은 아마 이종○ 선배였던 것 같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발로 찾아 오는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탓인지, 그는 나를 보더니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서울법대생이라고 밝히자 그는 더욱 의.. 더보기
무기의 그늘, 부패의 온실 무기의 그늘, 부패의 온실 - YS, DJ 정권의 무기도입 비리 및 해외비자금 은닉 의혹 실태 - 1. 글을 시작하며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지난해 발표한 세 차례의 글을 통해 김대중의 위선과 기만, 그리고 임동원 씨의 간첩 혐의 및 국정원의 도청 실태를 밝힌 바 있습니다. 저는 지난해 세 번째 글에서‘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다시 펜을 들면서 그러한 저의 다짐을 깰 수밖에 없는 비통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 번 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제가 국민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리는 이유는 개인적인 영달이나 사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저의 글이 혹시라도 국민 여러분께 뭔가 가르치려 들거나 훈계하.. 더보기
김대중 정권의 노벨상 수상 공작 기자회견에 즈음하여 안녕하십니까? 김기삼입니다. 저는 오늘 김대중 정권의 노벨상 수상 공작을 설명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지난 김대중 정권 5년간 국가 통치권자에 의한 반역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적을 이롭게 하고 우리의 안보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믿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에 눈이 어두워 우리의 조국에 반역행위를 했다고 믿습니다. (아래에서는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김대중 씨는 노벨상 수상을 공작하기 위해 햇볕정책이라는 기만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김대중 씨는 노벨위원회가 자신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기 위해서는 민주화와 인권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breakthrough)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잘.. 더보기
거짓의 희극, 도청의 진실 거짓의 희극, 도청의 진실 - 국정원의 불법적인 도청 및 감청 실태 - 서언 국민 여러분께 또다시 드립니다. 조국이 엄중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면서 무거운 심정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위선과 기만,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여러분께 밝힌 바 있습니다. 이 기회를 빌려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송금, 그리고 임동원 씨의 간첩혐의를 밝힌 저의 글에 대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간악한 무리들은 반성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를 부도덕하고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저들의 졸렬한 대응에 괘념치 않습니다만, 때가 되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더보기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 - 임동원의 간첩 의혹 - 서언 국민 여러분께 다시 드립니다. 조국의 안보 현실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짙은 핵구름이 한반도 상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깨어나셔야 합니다. 어제(2003년 2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뒷거래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그 내용을 접하고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예전에“김대중은 뒤돌아서면 거짓말을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김대중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거짓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뻔뻔스러움에 아연할 따름이며, 영원히 구제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 더보기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 1.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실상- 김대중의 노벨상 노욕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가면 뒤에 가려진 김대중 정권의 추악하고 위선적인 본모습을 국민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지난 5년간 김대중 정권이 민족과 역사 앞에 저지른 지울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의 양심을 걸고 국민 여러분께 밝힙니다. 김대중이‘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대북 정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근본 이유는 노벨평화상에 대한 지독한 노욕(老慾)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정원을 동원하여 해외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김정일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습니다. 먼저, 김대중 정권이 국정원을 동원하여 벌인 노벨상 공작에 대해 설명드리겠습.. 더보기
목차 목 차 저자서문 제 1 부 양심선언 1.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 -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2.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 – 임동원의 간첩 의혹 3. 거짓의 희극, 도청의 진실 - 국정원의 불법 도청 및 감청 실태 4. 무기의 그늘, 부패의 온실 - YS ·DJ 정권의 무기도입 비리 의혹 5. 기자회견에 즈음하여 6. 노벨상 수상 공작 개요 제 2 부 나의 이야기 제 1 장 젊은 날의 기억 정보기관과의 첫 만남/돌베개와 사상계/이념의 바다에 빠져/미 8군 19 지원사령부/국정원 입사를 결심하기까지 제 2 장 어린 시절의 추억 충절의 고장에서 의열을 배우다/나의 가족/어린 시절 추억의 단편들/ 학창 시절 기억의 조각들 제 3 장 병아리 기관원 시절 03 정부의 정규 30기/정보학교의 생활.. 더보기
머리말 때로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건가 보다. 내가 이런 책의 서문을 쓰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말이다. 나는 늘상 글쓰기에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책을 쓸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못했다. 책을 쓴다는 건 나의 상상력 밖의 일이었다. 고백하건데, 나는 자서전을 쓸 정도로 대단한 삶을 살지 못했고, 회고록을 남길 정도로 인생의 연륜도 없다. 그래서, 이 작은 기록이 실패한 전직 정보 요원의 한풀이나 넋두리 정도로 치부되지 않을까 걱정 되기도 한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여러 가지 일들을 -내가 직접 경험한 일들뿐만 아니라 내가 어깨 너머로 보고 들은 일들까지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흔히 정보 종사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