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 젏은 날의 기억

5. 국정원 입사를 결심하기까지

내가 정보기관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많은 주저함과 망설임이 있었다. 나도 오랫동안 정보기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보기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도,‘내가 위장취업을 하는 게 아닌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기도 했다. 경찰서에 들락거리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스스로 골수 문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이 나의 적성에 맞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흔히, “20대에 좌익에 빠지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아직 좌익에 빠져 있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20대에 한 때 깊이 좌경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접어 들면서 생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문득 깨달음이 있었는데,“현실 세계를 이념의 틀에 억지로 구겨 넣으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복학해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같이 입학했던 동기들은 이미 졸업하고 없었다.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운동권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민주화 조치와, 올림픽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 자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모두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나는 복학하고 나서도 한동안 방황하며 보냈다. 후배들 틈에 끼여 그럭저럭 학교는 다녔지만, 열심히 공부하지는 못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마음 잡고 고시공부나 해 주기를 원했다. 나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고시 공부를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법시험은 한 번도 응시해 보지도 못했다. 사실은 변변히 준비하지도 못했다.

나는 고시 준비도 않고, 운동권에 투신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인이 되어 갔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빵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말이 더 이상 레닌이 쓴 책 제목이 아니었다. 바로 내 문제였다.

그래서, 우선 조금 더 만만하게 보이던 외무고시를 보기로 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행정고시를 보자니 별로 전망이 없어 보였다. 그럭저럭 외무고시 1차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2차는 준비 부족으로 중간에 나왔다. 1년 더 재수해볼까도 생각해 봤으나, 공부를 더할 돈도 기력도 없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복학 후 나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파일 폭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로동자연맹(사로맹) 사건이었다. 나는 89년 복학하여 남궁호경 교수로부터 형법총론을 배웠는데, 이 괴짜 교수님은 형법은 강의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얘기만 했다. 사실 국가보안법은 석사과정에서나 다루어야 할 과목이지, 대학에 갓 들어 온 새내기들이 배울 과목이 아니었다. 아무도 문제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는 남궁 교수가 자신의 교단권을 남용한(?) 처사였다.

남궁 교수는 학생들에게 두 권의 책을 과제로 주었는데, 한 권은 『남영동 24이고, 다른 한 권은 『보안사』라는 책이었다. 남영동은 김근태 씨가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한 경험을 기록한 책이고, 보안사는 김병진이라는 재일교포 청년이 보안사에서의 근무 경험을 기록한 책이었다. 김병진은 신림동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보안사에 체포된 후, 보안사에서 역용(易用) – 자수한 간첩이 거꾸로 협조자로 활동하는 것 - 으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탈출한 후 그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내부의 여러 일들이, 내가 보안사라는 책에서 읽은 것과 똑같은 데 놀랐다. 상관의 이름이라든가 내부의 분위기, 업무 행태와 구조가 책에서 보았던 내용과 비슷한 게 많았다. 나는 일 개 육군 이병이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놀랐다. 이 때 나는, ‘정보기관이란 데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몸소 들어가우리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우선은 먼저 들어가서 직접 보고 나서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사로맹에 가입한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사로맹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박노해 시인이 발간하던 노동해방문학이나 여러 가지 유인물을 통해 그들을 활동내용이라든가 지향점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미영인가 하는 여 조직원이 쓴 수기 형식의 책도 읽었다. 그 책은 안기부 도서관에서 다시 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사고는 NL계열 보다는 PD계열에 조금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위수김동이니 친지김동이라고 외치는 친구들을 경멸했다. 북한을 대안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주적으로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려는 사로맹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말하던 소위과학적인 투쟁방법론도 높이 생각되었다.

그런 사로맹이 안기부에 의해 일망타진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전국에 있는 사로맹 중앙위원들이 하루 아침에 검거되었다. 이는 안기부 정형근 수사국장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갑자기도대체 안기부라는 데가 어떤 곳이길래, 한 날 한 시에 사로맹을 일망타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의아심이 생겼다. 정보기관 안에 들어가서,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굳어졌다.

나는 나중에 안기부에 입사하여 교육받을 때, 수사국 출신의 교수님으로부터 사로맹을 검거하게 된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안기부는 사로맹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기부는 사로맹 중앙위원이었던 남진현이라는 사람의 삐삐를 의도적으로 고장 냈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삐삐는 최첨단 통신 장비라, 청계천에서만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사국 수사관들은 청계천 수리점에 잠복하고 있다가 남 씨의 꼬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 후 사로맹 조직을 완전히 파악하고도, 한꺼번에 다 잡기 위해 기다렸다 일망타진했다는 것이다.

체포된 박노해 씨가 자신을 심문하는 수사관들에게, “당신들 같이 충직한 사람들과 함께 혁명사업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본 후, 안기부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안기부에 들어가서 박노해 씨에 대한 수사기록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노동의 새벽이나 노동해방문학을 통해 가지고 있었던 그에 대한 환상을 적잖이 버리게 되었다. 그도 별 수 없는 또 한 명의 노동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시사기업이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업할 자본이 없으니 취직은 해야 했지만, 사기업에 들어가 평생을 사노비같이 살기는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국가의 녹을 먹는 관노비가 되겠다는 심산으로, 눈 딱 감고 안기부에 입사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나름대로 정보기관에 대해 사전 연구를 좀 했다. 먼저 입사한 친구에게서 기본적인 정보를 얻었다. 정보기관과 관련 되는 책이라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구해다 읽었다. 김경재 전 의원이 쓴 세 권짜리 『김형욱 회고록』을 비롯하여, 동아일보에서 펴낸 『남산의 부장들』이란 두 권짜리 책자와, 조갑제 씨가 지은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책도 읽었다. 다 합하면 10여권 이상 읽은 것 같다. 하지만, 훗날 뒤돌아 생각해 보니 이들 서적들이 내가 정보기관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정보기관이란 곳은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지난번 도청사건 이후 많은 언론들이 나를 실패한 고시병 환자로 묘사했다. 나로서는 기분이 과히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사법고시장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남궁 교수는 몇 년 후 재임용에 탈락했다.

필자는 이 기회를 빌어 윤석양씨의 용기와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윤석양씨는 월간중앙 2004 7, 8월 호에 아담의 곪은 사과라는 자전적인 글을 게재했다. 그는 그 글을 통해 양심선언 전후에 겪었던 내면적인 갈등을 담담하고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