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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 젏은 날의 기억

4. 미 8군 19지원사 법무감실

그 즈음 나는,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먼저 군대라도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한국군에 들어가면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카투사를 택했다. 나는 85년 말에 카투사 시험에 응시했다. 당시엔, “카시가 국가 5대 고시 중의 하나라고 느스레를 떨었다. 물론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력고사 수준이었다.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86 4,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학우가 신림사거리에서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엔 대학생들이 전방에 입소하여 일주일간 교련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그들은, “양키의 용병교육을 거부한다며 온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미군의 용병이 되어 미국 군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심한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1986 5 15. 경부선 철로 변에 만발하고 있는 아카시아 꽃을 보면서 나는 논산훈련소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훈련소 앞 이발관에서 머리를 밀면서 거울에 비친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을 바라보았다.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군대로 도망 온 창백한 젊은 지식인의 모습이 거울 속에 어른거렸다. 현실, 이념, 방황, 젊음, 모든 것과 이별하고 싶었다.

훈련소에서 신체 검진을 받고 나서 내가 간디스토마(간흡충)를 앓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건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팔뚝에 피부 반응검사를 했는데, 붉은 반점이 둥그렇고 커다랗게 나타났다. 양성반응이었다.

역도부에서 운동을 할 때 생각보다 근육이 늘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그게 알고 보니 간 디스토마 때문이었다.[1] 간이 상해가는 줄도 모르고, 운동과 과음으로 미련하게 몸을 혹사했던 것이다. 후회해 봐야 이미 지난 일이었다. 뒤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의무실에서 주는 독한 약을 먹고 치료했다.

논산훈련소에서 박박기던 기억들 가운데서, 고산 유격장까지 밤새 야간 행군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달빛 아래 완전군장을 하고 밤새 행군했다.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유격훈련장은 전주 운장산 기슭에 있었다. 2주간의 유격 훈련은 힘들었다. 고등학교 동창 녀석 하나가 조교로 와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격장 아래 고산저수지가 있었다. 구름에 묻힌 운장산의 풍경과, 달빛이 내리 비치는 저수지의 풍광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 평택의 미군부대 내에 있는 카투사훈련소로 이동하여 다시 4주간 훈련을 더 받았다. 논산에 비해 평택은 훈련소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헐렁한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식사의 질이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논산에서 멀건 국에 시커먼 짬밥만 먹다가, 평택에서는 갖가지 기름진 양식에 후식까지 먹을 수 있었다. 한동안은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애초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지원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내 딴에는 남북의 분단상황을 직접 체험해 보아야겠다는 자만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전방에 갈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공동경비구역에 지원하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만약 판문점에 갔더라면 어떤 형태로든 사고를 쳤을 것 같다. 

훈련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미 8 19지원사령부 법무감실에 배치 받았다. 법무감실의 영문명은 SJA(Staff Judge Advocate)였다. 공교롭게도 공동경비구역(JSA)과 영문 약자 스펠링이 바꾸어진 이름이었다. 한국군 지원부대장이 나의 출신학교를 고려해 특별히 배려해준 덕택이었다. 그는, “고급 인력이 미군부대에서 운전병으로 썩으면(?) 안 된다며 나를 법무감실에 밀어 넣어준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앞산 앞에 있던 캠프 워커에서 숙식하고, 대구 시내에 있던 캠프 헨리에서 근무했다. 카투사로서 근무하는 낮 생활은 군대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천국이었다. 군화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숙소와 사무실을 버스로 출퇴근했다. 함께 근무하는 미군들도 나에게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대부분 나의 상관들이었지만 계급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나의 영어가 별 신통치 않았지만 의사소통에도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법무감실에는 주한미군지위협정(SOFA)를 담당하는 한국인 군무원이 한 분 있었고, 카투사는 나 혼자였다. 전임자도 없었다. 아마 내가 제대한 후에는 후임자도 없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군대생활 중에 어려웠던 때는 주로 근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고 난 후에 벌어졌다. 비록 2 1실의 내무반 생활이었지만 카투사들끼리 집합이 걸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국군의 못된 악습이 카투사에서도 남아 있었다. 배치된 지 얼마 안된 초기에 선임들로부터 얼차려를 심하게 받았다. 흔히 겪게 되는 것처럼 원산폭격에 앞으로 전진 뒤로 후퇴 같은 것이었다. 구타도 종종 있었다. 몇 번하니 머리에서 손톱만한 허연 비듬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참고 지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러한 악습에 저항하기로 했다. 미군들 사이에 부대끼며 스트레스 받는 것도 서러운 판에 같은 동족으로부터도 시달려야 한다는 데에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선임병들에게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라며 얼차려를 거부했다. 내가 같이 죽겠다고 나서는 데야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선임병들 중에는 어쩌다가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신병으로 들어오게 됐나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개인적인 사보타지가 후임병을 괴롭히는 악습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가 선임병장이 되고 나서는 선임병이 후임병을 학대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도 엄격히 금했다. 신병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세상은 참 좁다. 지난 해 , 제대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 어느 군대 후배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가 선임병장 하던 시절에 전입온 신병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 인터넷 싸이트의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내 왔는데, “왕따에 집단폭행을 당할 위기에서 김기삼 병장이 저를 24시간 데리고 다니면서 보호해 주었다고 썼다. 아마 인터넷 상에서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변명해 주느라고 그런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나는 잊고 있었는데, 그는 고맙게도 기억해 주었다.

미군의 사법집행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보면서, “미군의 사법제도가 생각보다 훨씬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후에 들으니, 미군의 사법체계가 미국의 일반 사법체계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반미 사고에 절어 살다가, 우편번호 상으로나마 - 미군부대는 우편번호상 샌프란시코(APO SF)였다 - 미국의 한 모퉁이를 실제로 겪어보니, 미국이란 나라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 때의 경험으로,‘언젠가 기회가 되면 미국 법과대학에서 공부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미군 부대에서 경험은 내가 이념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일병 시절에 숙소에 이념서적을 수십 권 갖다 놓았다. 당시 유행하던 월간『말』지도 창간호부터 십여 권을 사물함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다. “지는 광화문에 있던 논장서점에서 틈틈이 사 모아 둔 것이었다.

초창기『말』지는 두께는 얇았지만, 내용은 알찼다. 저강도 전쟁이니 하는 용어를 그 잡지에서 처음 접했다. 후에 『말』지가 두꺼워지면서, 내용은 오히려 빈약하고 조악해졌다. 같은 방을 쓰던 선임병장은, “인사계가 방을 검열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며 걱정해 주곤 했다.

그런데, 미군부대 생활에 익숙해 지면서 나 자신이 서서히 이념과는 조금씩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미군들과 섞여 지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꾸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GI문화만 보더라도, 우리보다는 여러 모로 크게 앞서 있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멀쩡하던 녀석도 미군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 반미주의자가 되어 나온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나는 반미주의자로 들어갔다가, 비록 친미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반미주의자에서는 탈피해서 나왔다. 나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말년 병장 시절에 군대 내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88 올림픽 경기를 보았다. 그 해 11월 말 전역했다. 정확히, 30개월 9일간의 군대생활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개 27개월 복무하고 제대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 교련 훈련을 두 학기 이수하긴 했지만 휴학으로 인해 1학기만 두 번 이수했다는 이유로 단 하루도 복무단축 혜택을 받지 못했다.



간디스토마는 낙동강 연안 지역의 풍토병이었지만, 나는 그 때까지 민물고기 회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