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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2. 어린 시절의 추억

7. 나의 가족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부모님 이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위로 형이 두 명 있고 누나와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우리 마을은 이름대로라면 크게 흥해야 마땅했지만유감스럽게도 명칭과 다르게 가난한 곳이었다당시 시골은 어디나 다 살기 어려웠지만우리 마을은 특히 오갈 데 없는 뜨내기들이 모여들던 곳이라서 더 가난했다.

하지만우리 집은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우리 집은 마을에서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편이었다머슴을 한 사람 둘 정도는 되었다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지런히 농사 지어 저축하여 조금씩 땅을 늘린 덕분이었다덕택에 나는 어린 시절에 도시락을 못 사가 굶어 보았거나등록금을 못 내 야단맞은 적은 없었다물론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3]

아버지는 농사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바깥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그래서농사일은 주로 어머니 차지였다험한 농사일을 감당하느라 어머니의 고생이 심했다우리 어머니는 아마 이 세상의 어느 어머니보다 더 힘들게어렵게 사신 분일 것이다어머니는 고된 농사일에 단련된 탓인지한창 때는 어지간한 남정네들보다 근력이 더 좋았다.

어머니는 소박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새벽기도를 나가셨다물론 할머니가 된 요즘에도 빠지지 않고 계속 나가고 계실 것이다.

지난번 내가 망명재판을 앞두고 있을 때어머님께서 나에게 국제전화를 하셨다그 때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요즘 널 위해 매일 밤샘기도를 한다고 말씀하셨다내가 짐작하기에 기도 제목은 뻔하다. “하나님아직도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우리 셋째를 속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뭐 대충 그런 내용일 것이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에 나갔다어린 시절엔 나도 어머니를 따라 일요일마다 교회에 출석했다우리 시골 교회는 교인이 10여 명에 불과한 초미니 교회였다나는 교회에서 받은 상품으로 초등학교의 모든 학용품을 조달하다시피 했다나의 기본적인 도덕관념은 전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나는 친구 영국이와 함께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학교까지 뛰어서 갔다도회지 아이들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첫 등교하는 것은우리 같은 시골 애들에게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학교에 도착해 보니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다예쁜 여선생님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 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를테면정체성의 위기라고 할만한 사건(?)을 겪었다나는 그 때까지 내 이름이 김기환인 줄 알고 있었는데선생님은 나를 김기삼이라고 불렀다선생님 말씀으로는호적이라는 곳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내가 여덟 살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선생님은 나를 (滿)으로” 다섯 살이라고 했다.

나는 왜 갑자기 이름이 바뀌고 나이가 세 살이나 줄어들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호적이 뭔지도, “만으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선생님이 이름을 틀리게 부르고나이도 엉터리로 가르쳐 준다고 생각했다.

솔직히나는 아직도 내 이름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기삼(基三)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좀 촌스런 느낌이 있다나는 끝에 숫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대체로 어감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다어느 숫자도 이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심지어 단위가 좀 더 큰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숫자가 들어간 이름은 어딘지 성의(?) 없게 지어진 이름이라는 느낌이 있다.

아마 나의 아버님은 내가 태어난 후 즉시 호적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내가 남자아이 가운데 셋째라는 생각에 그냥 별 뜻 없이 기삼이라고 등록했던 모양이다그리고는 집에서는 그냥 기환이라 불렀다아직도 나의 시골 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이름만 틀린 게 아니라 생년월일도 잘못 등재 됐다나의 호적상 생년월일은 실제보다 1년 가량 늦다생일도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기재되었다아마도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그 시절의 시골에서는 살아 남는 것 봐가며 적당한 때에 호적에 올린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던 모양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나의 출생에 관한 에피소드를 한 가지만 더 소개 해야겠다우리 집은 어머님이 무척 건강했기 때문에 모두 자로 잰 듯 두 살 터울이었다그런데유독 나와 바로 위의 형은 네 살이나 터울이 졌다어릴 때 나는 그 점이 항상 궁금하였다. “혹시 나와 형 사이에 한 명이 일찍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어머니에게 그 점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어무이(어머니), (히야()하고 내하고는 네 살이나 차이가 나능교(납니까)?”그러자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내가 세치(나코(낳고더 안 나을라(낳으려켔는데(했는데), 할무이(할머니)가 하도 더 나라고(낳으라고케사서(해서니하고 니 동생하고 나온 기다라고 하셨다그 얘기를 듣고나는 불현듯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가족계획 캠페인이라는 것이 등장했다전후 베이비 붐이 일어 인구증가율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산아제한이 국가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요즘처럼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 되어 아이를 더 낳으라고 채근하는 사태가 벌어지리라곤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 들어선 군사 정권은 소위 『3-3-33』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하였다풀이하자면, “세 명의 자녀를 세 살 터울로 서른 세 살 이전에 낳자라는 구호였다당시에는 이런 식의 표어가 유행했던 것 같다목표지상주의와 효율지상주의가 판을 쳤던 군사정권은 아무래도 숫자와 친했던가 보다이런 구호에는 하면 된다라는 돌격대 정신이 베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표어 중에서는 『3-3-3』이란 것도 있었다. “하루에 세 번식사 후 삼 분 이내에삼 분간이를 닦자라는 캠페인이었다요즘 기준으로는 좀 황당하고 우습지만그 시절에는 그런 게 당연한 일이었다지금은 모두 박물관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구닥다리 옛날 얘기 같지만따져 보면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돌이켜 보면그리 멀지 않은 시간 속에 보건소에서 줄지어 예방접종을 맞고학교에서 집단으로 채변검사를 하고 구충제를 나눠주던 시절이 있었다.

어쨌든우리 어머니도 혁명 정권의 시대정신(?)에 동참하여 세 명만 낳고 그만 낳으려 했는데, “구시대 정신에 살고 계셨던 할머니의 강권에 의해 나를 낳았다는 말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할머니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해 두는 게 좋겠다우리 할머니는 전형적인 갱상도(경상도시골 할매(할머니)였다할머니는 학교 갔다 왔니?”핵교 갔다 왔노?”라고 하고, “나무에 올라가지 마라를 남괴 올라가지 마라고 말했다내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박박 밀지 않고스포츠 형으로 좀 길게 깎아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온 돈 주고 반 머리 깎아 왔노(왔느냐)?”라고 핀잔을  주시던 분이었다 

할머니는 한글을 전혀 읽지 못했다아주 완전히 까막눈이었다글자는커녕 숫자도 읽을 줄 몰랐다심지어는 시계조차도 볼 줄 몰랐다할머니 방에는 작은 아버님이 생신 선물로 사주신 괘종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어느 날할머니께서 어머님께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야야아무래도 저 시계가 고장이 났는 갑다어제 밤에 저 시계가 한 번 땡 치고한 참 있다가 또 한 번 땡 치고세 번이나 그카더라...”

그 시계는 매 시각 중간마다 한 번씩 울리도록 되어 있었는데할머니는 우연히 12시 30분 이전부터 1 30분 이후까지 깨어 계셨는가 보다.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난 후할머니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적적했으면 그런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지독히 아끼며 살다 가셨다평생 좋은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고 남루하게 지냈다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아끼는 게 유일한 생존 비결인 걸로 아신 분이었다볏알 하나밥풀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우리 집 마당은 할머니가 하도 많이 쓸어서 언제나 반질반질했다어쩌다 소죽물에 밥풀이 하나라도 발견되는 날이면마치 큰 소동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경을 치셨다초등학교 시절나는 도시락에 밥알을 하나라도 남겨 가면 혼나기 때문에도랑에서 도시락을 씻어서 들어가곤 했다.



[1] 의열단은 밀양 경찰서 폭파사건, 종로 경찰서 폭파사건 등 1920년대의 주요 국내외 의거를 주도했다. 의열단 멤버들이 후에 광복군을 조직하는 모태가 되었다.

 [2] 솔직히 말해, 필자는햇볕이란 용어에 조금 병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 그런지, 이런 식의 오역에 거부감이 있다. 

 [3] 월간조선 2003 3월 호 노벨상 국제로비 진상 제하 기사에서는, 필자가 자장면 한 그릇 못 먹어 본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읍내 고전읽기 시험을 치러가서 자장면을 먹어 본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 먹은 자장면 맛도 생생히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