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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2. 어린 시절의 추억

9. 학창시절 기억의 편린들 나는 1977년, 면 단위 중학교에 진학했다. 한 학년에 네 개 반이 있었다. 나로서는 갑자기 훨씬 큰 물로 나간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나는 수업 이외에 따로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대신 책은 조금 읽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교실 내에 학급문고라는 것이 들어온 후 투명인간, 해저이만리, 삼총사 같은 책들을 재미 있게 읽었다. 고전읽기라는 게 생긴 후에는, 신유복전이니 박씨전이니 하는 책을 읽고 읍내에 시험 치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좀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어느 일본 사람이 쓴 다섯 권짜리 삼국지는 여러 번이나 읽었다. 걸리버여행기, 로빈슨크루소우 등도 읽었다. 세계위인전이란 두꺼운 책도 읽었는데, 그 책 속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막사이사이.. 더보기
8. 어린 시절 추억의 단편들 나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문명의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았다. 아마도 나는 문명 이전의 마지막 세대에 속할 것 같다. 우리 마을엔 전기도 전화도 수도도 없었다. 나는 예습이란 말도 복습이란 말도 몰랐다. 학교 갔다 와서는 진흙탕 속이나 모래사장에서 뒹굴면서 자랐다. 바쁜 농사철이면 농사일도 도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 먹이고, 꼴 베고, 소죽 끓이는 일”은 내 차지였다. 당시 시골의 주요한 교통수단은 소달구지였다. 좀 지나 경운기라는 물건이 들어오면서 달구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아버지가 “대동 경운기”를 몰고 오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이웃 동네는 국도변에 위치해 있어 전기도 일찍 들어 왔지만, 우리 동네는 그렇지 못했다.. 더보기
7. 나의 가족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부모님 이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위로 형이 두 명 있고 누나와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우리 마을은 이름대로라면 크게 흥해야 마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명칭과 다르게 가난한 곳이었다. 당시 시골은 어디나 다 살기 어려웠지만, 우리 마을은 특히 오갈 데 없는 뜨내기들이 모여들던 곳이라서 더 가난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편이었다. 머슴을 한 사람 둘 정도는 되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지런히 농사 지어 저축하여 조금씩 땅을 늘린 덕분이었다. 덕택에 나는 어린 시절에 도시락을 못 사가 굶어 보았거나, 등록금을 못 내 야단맞은 적은 없었다. 물론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3.. 더보기
6. 충절의 고장에서 의열을 배우다 1964년 한가위를 며칠 앞 둔 어느날, 나는 경상남도 밀양의 어느 작은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자손이 귀한 집도 아닌데다. 한창 바쁠 시절에 세상에 나온 죄로, 나의 세상 데뷰는 그리 떠들썩한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황으로 볼때 나의 탄생은 그저 "없는 살림에 먹는 입(식구)하나 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고향은 밀양시 상남면 평촌리 대흥동이라는 곳이다. 대흥동은 일본식 명칭이다. 아마 우리 동네가 일제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1930년대 초, 일제는 대륙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이라는 것을 시행하고 전국의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했다. 낙동강 한 지류였던 남천강(밀양강)에도 제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