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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2. 어린 시절의 추억

6. 충절의 고장에서 의열을 배우다

1964년 한가위를 며칠 앞 둔 어느날, 나는 경상남도 밀양의 어느 작은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자손이 귀한 집도 아닌데다. 한창 바쁠 시절에 세상에 나온 죄로, 나의 세상 데뷰는 그리 떠들썩한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황으로 볼때 나의 탄생은 그저 "없는 살림에 먹는 입(식구)하나 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고향은 밀양시 상남면 평촌리 대흥동이라는 곳이다. 대흥동은 일본식 명칭이다. 아마 우리 동네가 일제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1930년대 초, 일제는 대륙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이라는 것을 시행하고 전국의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했다. 낙동강 한 지류였던 남천강(밀양강)에도 제방을 쌓고 농지를 만들었다. 이 제방공사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정착하여 우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 동네는 남천강의 강둑을 따라 길게 자리 잡고 있다. 강둑은 높이가 10여 미터에 이르는데다, 길이는 족히 수십 킬로미터가 넘는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고향마을 풍경은 이수복 시인의 봄비이미지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후략>”

어린 시절, 나는 온전히 남천강가에서 자랐다. 남천강은 나의 놀이터요 젖줄이었다. 해마다 봄철이면 강가 하천부지에서 노고지리 사냥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늦봄이 되면 호밀밭 고랑에서 전우놀이를 하며 뛰어 다녔다. 강가 모래사장에서는 빠구미를 잡고, 강둑에서는 소똥벌레를 잡았다.

여름철이면 하천부지에 소 먹이러 가서 동네 얘들이랑 축구하고, 목마르면 강 중간으로 헤엄쳐 들어가 강물을 마시곤 했다. 마른 모래톱 사이에서는 새하얀 물새알을 줍고, 젖은 모래톱에서는 노오란 재첩 조개를 잡았다. 나는 지금도 나의 피 속에는 남천강물이 흐른다고 믿는다.

내 고향 밀양은 충절의 고장이다. 조선조 사림(士林)의 태두인 점필제 김종직 선생이 난 곳이다. 점필재의 아버지 강호 김숙자는 야은 길재 선생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조선개국에 반대하던 야은이 금오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김숙자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강호 김숙자가 처가인 밀양으로 이사해서 점필재를 낳았다고 한다. 점필재가 태어 났을 때, “마을을 가로 질러 흐르던 시냇물이 단물로 변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시내를 감천 또는 감내라고 부른다.

사림의 본거지이다 보니, 밀양에는 아직도 유교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한창일 무렵 안동 사람들이 밀양을 낮추어, “소밀양(小密陽)”이라고 비하한 데 대해, “소안동(笑安東)”이라고 응수해 줬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 올 정도다. 구한말, 경부선과 경전선 분기점이 밀양이 아니라 삼랑진으로 정해진 것도 유림들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의 재실 이름은 탁삼재(卓三齋)이다. 풀이하자면, “충∙효∙열 세 가지에 뛰어났다는 말이다. 우리 집안의 시조는 임진왜란이 나자 90 노모를 등에 업고 의병에 나선 분이라고 한다. 그의 두 아들은 병자호란이 나자, 의병에 참가해 경기도 광주의 쌍령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 부인들은 남편들의 주검을 장례 지내고 난 후, “자결하여 절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렇게 2대에 걸친 충효열의 정신이 우리 재실 이름에 남게 됐다.

 밀양에는 또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는 아랑의 전설이 살아 있다. 아랑의 전설은 해마다 여름이면 TV에서 납량특집극으로 단골로 이용되는 소재다. 요즘도 아랑을 기념하여, 매년 5월 초순이면 며칠간 아랑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아랑제는 남원의 춘향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방 문화축제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밀양은 또한 의열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명대사를 배출한 곳이다. 밀양의 재약산 기슭에 있는 천년 고찰 표충사에는 그 이름에서부터 사명대사의 얼이 서려 있다.  사명대사의 생가 부근에 있는 사명대사비는 요즘도 국난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밀양은 또한 의열단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의열단은 권총 한 자루로 일제에 저항했던 항일결사 단체였다. 1919 4월 의열단이 만주에서 최초 결성되었을 때, 의열단의 단장 (의백)이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하여 열 세 명의 단원 가운데, 일곱 명이 밀양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원봉과 의열단은 그 후 일제 말 중국에서 광복군의 모태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몇 해 전 『밀양』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외국의 무슨 유명 영화제에도 출품하여 대단한 상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그 영화의 선전 포스트에 밀양을,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이라고 번역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아마 무지에서 비롯된 오역이거나, 아니면 햇볕론자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오역인 것 같다.

밀양은 한자어로 빽빽할()() 자를 쓴다. 굳이 풀이하자면,“햇볕이 잘 드는 땅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리 늘려 해석하려 해도 무슨 비밀스런햇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실제로, 밀양은 소백산맥 줄기의 남쪽 편에 위치한 분지이기 때문에 햇볕이 잘 드는 곳임은 틀림 없어 보인다. 요즘도 가끔 낮 최고 기온이 가장 높은 곳으로 밀양이 뉴스에 나오곤 한다. 달기로 소문난 얼음골 사과가 바로 밀양산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과일의 당도는 일조량이 결정한다.

이 기회에 밀양의 명칭에 대해 뱀발을 좀 더 그리면 다음과 같다. 밀양의 고유한 우리말 명칭은 미리벌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를 이두식으로 표기하여 추화군이라고 불렀다. 미리벌을 음역하면, (미리) ()에 불() ()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에 밀주(密州) 또는 밀양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후에, 조선시대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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