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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3. 병아리 기관원 시절

12. 공수와 해양 훈련

전반기 교육이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를 즈음에 산악훈련을 갔다. 나는 동기들이 먹을 쌀자루를 지고 북한산에 오르느라 땀깨나 흘렸다. 북한산과 도봉산 일원에서 야영하며 며칠을 지냈다.[1] 우리들은 산 속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낮에는 체력 단련을 하고, 야간에는 담력 훈련을 하기도 했다.

몸은 고되기는 했으나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었다. 비좁은 텐트 속에서 야영하다 보니 동기들끼리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끔 훈련 후에는 소주 한 잔으로 회포를 풀 때도 있었다. 북한산 위에서 서울의 야경을 보며 마시는 소주는 특별한 정취가 있었다.

밤이면 텐트 속에서 꾼들끼리 몰래 어울려 세븐오디 포커를 치기도 했다. 세븐오디가 우정을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스포츠라는 걸 알게 되었다. 훈육관은 이런 종류의 여가선용(?)은 관대하게 눈감아 주었다. 이후 양지관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몰래 포커판을 벌였다. 교육 후에도 마음 맞는 동기들끼리 가끔 여관이나 음식점에서 밤새 포커 회동을 벌이곤 했다 

전반기 교육 과정의 하이라이트는 공수와 해양훈련이었다. 두 훈련 모두 체력과 담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었다. 공수훈련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특전사 훈련장에서 3주간 실시되었다. 공수훈련장에 도착해보니, 훈련장이 모래사장일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이 났다. 그저 산골짜기에 나무를 베내고 적당히 정리한 곳이었다.

우리는 일반 훈련병들 틈에 끼여 함께 훈련을 받았다. 처음 2 주간은 기본동작과 막타워(모조시설) 훈련을 했다. 기본동작을 익히기 위해 쉴새 없이 뛰고 구르는 동작을 반복했다. 막타워는 높이가 10미터쯤 되었다. 인간이 가장 공포감을 갖는 높이가 그 정도 거리라고 한다.

나는 평소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막타워에서 뛰어내릴 때 도통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두 손으로는 예비 낙하산을 착 감싸 쥐고, 다리를 곧게 펴서 몸을 V자 모양으로 만들면서, 양 발로 동시에 착지해야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부끄럽게도 여자 동기들 중에서도 용감하게 뛰어 내리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는 유감스럽게도(?) 아니올시다였다. 뛰어 내릴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다 보니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았다. 겁에 질려 눈을 감는 것도 큰 문제였다. 착지자세가 잘 나오는 친구들은 먼저 통과하여 쉬고 있는데, 나는 항상 맨 나중까지 남았다.

우리가 훈련 받고 있는 와중에 모 방송사의 무슨 드라마 제작팀이 와서 공수훈련 장면을 촬영하고 돌아 갔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때 탈렌트 최수종 씨가 막타워를 멋있게 뛰어내렸다고 했다. 그가, 생긴 것 하고는 다르게, ‘깡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무슨 연속극에서 그가 장보고를 연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보여준 카리스마는 그의 성격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수 훈련 중에 한 번은 우리 동기들과 학사장교 출신 훈련병들간에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집단인데 비해,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오합지졸이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두들겨 팼다. 같이 공수 훈련을 받던 하사관 후보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란색의 임시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기 때문에 단풍하사라고 불렸다. 그들 눈에 우리들이 좀 과격해 보였던지, 그들은 우리를 대북 침투요원이라며 수군거렸다.

그런데, 문제는 패싸움 후에 발생했다. 구타를 당한 장교들이, “사병들 앞에서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 장교로서의 품위가 손상되었다, “훈련을 거부하겠다고 들고 나왔다. 훈련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바깥으로 소문이 날 리는 없었지만, 외부로 알려지면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그 전 해에는 공수교육을 받던 안기부 훈련생들이 외출 중에 음주사고를 일으킨 것이 언론에 보도되어 크게 말썽이 된 적이 있었다.

이 번에도 훈육관이 나섰다. 마침 훈육관이 학사장교 출신인지라, 장교들을 달래는 데 유리했다. 훈육관은 패싸움을 주도한 동기들을 불러내 공개적으로 밧따를 쳤다. 몽둥이가 여러 개 부러져 나가면서 약간의 전시효과가 있었다. 훈육관이 그런 식으로나마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자, 학사 장교들도 분이 좀 풀어진 것 같았다. 그들도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는 걸 원치 않았다. 다행이 사건이 그 정도에서 원만히 해결되었다. 

공수훈련은 처음 2주간 기본훈련 기간이 힘들었고, 마지막 주 실전 낙하 때는 오히려 편했다. 나는 체력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다른 동기들은 매우 힘들어 했다. 특히 여자 동기들은 불쌍하게 보였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으나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공수훈련은 최악의 후유증을 남겼다.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낙하산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안전이었다. 부상 당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안전하게 낙하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낙하지점을 잘 잡아야 했다. 중앙 십자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평지에 착지해야 했다. 적어도 훈련장 안쪽에 떨어져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두 발을 동시에 착지하는 것이었다. 낙하하다가 지면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땅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당황하여 발을 헛디디면 발목을 삐게 된다. 자갈밭에라도 떨어지게 되면 다리뼈가 부러져 나간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네 차례 점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구점프 1, 헬기 점프 1, 그리고 야간과 주간 비행기 점프 각 1회씩이었다. 기상 악화로 인해 기구점프는 몇 명만 실행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 헬기 점프는 그런대로 무사히 넘어 갔다. 그런데, 야간 비행기 점프 때 운이 좋지 못했다. 불행히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었다.

나는 낙하 대열의 중간쯤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십자로 근처의 안전지대에 무사히 착지했다. 하지만, 동기들 중에서는 바람에 밀려 멀리 훈련장 바깥으로 날아가 버린 친구도 있었다. 어떤 동기는 바위에 부딪혔고, 일부는 나무에 걸렸다. 마이크로 훈련상황을 점검하고 지휘를 하던 통제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거침 없이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주간 낙하 시에도 불운이 이어졌다. 두 번의 낙하 훈련에서 부상자가 열 댓 명이나 나왔다. 단순히 발목을 삔 정도는 아예 부상자 축에 끼지도 못했다. 대부분 다리뼈가 부러져 나갔다. 그나마 평생 불구자가 안 생긴 걸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 전 해에 교육받은 선배 중에서는, 심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불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부상 당한 동기 가운데에는 친구 김준О이도 포함되었다. 그는 사고를 당할까 봐 발톱도 깍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가 가장 크게 다쳤다. 시퍼렇게 부어 오른 그의 다리를 보고 있자니 애처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큰 수술을 받고 여러 달 동안 기브스를 한 채 살아야 했다.

훈련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강대О 교무과장이, “이렇게 사고가 많이 난 전례가 없었다며 우리를 심하게 나무랐다. 그는 마치 우리가 군기가 빠져서 사고가 많이 난 것처럼 말했다. 위로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자신의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 후 김대중 정권에서, 국정원의 인사를 담당하는 총무관리국장이 되었다고 한다.

공수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해양훈련을 떠났다. 해양훈련은 인천 월미도 부근에 있는 모 UDT부대에서 몇 주간 실시되었다. 나는 수영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훈련 받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어린 시절 강가에서 익힌 수영실력이 도움이 됐다. 나는 우수 수영요원으로 뽑혀 따로 수중폭파 (스쿠버) 훈련도 맛뵈기로 약간 배웠다.

낮에는 뻘밭을 기고, 밤에는 하수도 구멍을 통과했다.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행군하고, 노를 저어 상륙하는 훈련도 받았다. TV에서 보던 UDT 병사들이 하는 훈련을 모습을 우리도 똑같이 그대로 했다. 모두들 육체적으로는 고단해 했다. 이번에도 여자 동기들이 특히 많이 힘들어 했다. 후에 교육을 마치고 그들이 실무 부서에서 배치되고 나서, “공수와 해양훈련 때 고생한 게 아까워 회사를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반기 교육을 마칠 즈음에 강남에 있는 향군회관에서 위로 파티가 열렸다. 나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독한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다, 속된 말로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이다. 마신 것과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횡설수설 해댔다고 한다. 나는 양지관으로 돌아온 후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훈육관이 단단히 화가 났다. 나 하나 때문에 전 동기들이 한밤 중에 집합하여 운동장을 수십 바퀴나 돌았다.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 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동기들이 돌아가면서 들쳐 업고 뛰었다. 다음 날 술에서 깨어나 보니, 모두들 지난 밤 나를 업고 뛰었던 무용담을 들려 주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교육과정 중에 몇 차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 실수는 전반기 교육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도중에 미처 재채기를 참지 못했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 막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일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나간 밥알이 테이블에 원 바운드하더니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던 여자 동기의 식반 안으로 골인해 버렸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고맙게도 그 여자 동기는 현명하게(?) 사태를 수습해 주었다. 그녀는 키도 작고 입도 작고 나이도 작고, 모두 다 작았는데, 마음 하나만은 넓고 깊었다. 그녀는 훈련을 마치고 같은 동기와 결혼했는데, 아마도 회사 생활과 결혼 생활을 다 잘 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실수는 전반기 교육이 끝날 즈음에 일어 났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단체로 테니스를 배웠다. 그런데, 코트 수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한 코트에 여러 명이 들어가 쳤다. 나는 혼자서 서비스 연습을 했다.

그런데, 나의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 있었던 탓이었던지, 내가 친 공이 상대 코트에 있는 여자 동기의 얼굴을 강타하고 말았다. 그녀는 공수훈련 때 막타워 자세가 가장 훌륭하게 나왔던 여걸(?)이었는데, 내 공을 맞고는 짚단 넘어지듯이 그 자리에 퍽 쓰러져 버렸다.

급히 가까운 경희대 병원으로 그녀를 실어 갔다. 불행하게도 눈에 정통으로 맞았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이 되었다. 병원비는 나와 동기회가 반분해 부담했다. 정식으로 사고를 보고하게 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에 사적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몇 주간 입원 후에 무사히 퇴원했다. 동기들은, “너가 결혼만 안 했으면 책임져야 하는 건데…”라며 놀려 댔다. 결국 그녀도 병원에 자주 면회를 갔던 어느 동기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아마 그녀도 지금쯤 훌륭한 분석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신동아 2008 7월 호에서 정규과정 학생들의 지리산 종주 훈련을 기사화했다. 요즘은 북한산 일대에 등산객이 너무 많아 산악훈련 장소가 지리산으로 옮긴 모양이다. 동 기사는 산악훈련 과정을 현장감 있게 잘 소개하면서 정보와 감동을 함께 전달하는 훌륭한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