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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3. 병아리 기관원 시절

14. 국정원을 지망하려는 후배들에게

        이상으로 정규과정 1년간의 교육에 대해 주마간산 식으로 회상해 보았다. 나의 경험이 국정원에 입사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젊은 후배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국정원 정규과정 교육 경험을 마무리 하면서, 이 기회를 빌어 국정원을 지망하려는 젊은 후배들에게 내가 평소에 개인적으로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몇 마디 전하고자 한다. 

요즘은 국정원이 꽤 인기 있는 직장이라고 한다. 입사 경쟁도 아주 치열하다고 한다. 도청문제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서의 국정원의 인기는 여전한 모양이다. 내 개인적인 짐작으로는, 국정원의 근무여건이나 급여수준 등이 어느 정도 공개되어 더욱 그런 경향을 부추기고 있지 않나 싶다.

사실 국정원의 봉급은, 다른 모든 사항들과 마찬가지로, 기밀로 취급되어 오랫 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요즘은 국정원의 물색관들이 우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근무여건이나 급여수준 등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공개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입사하는 후배들을 보면 한결 같이 잘 생기고 실력들도 대단해 보인다. 다들 우수한 성적에다, 영어는 기본이고 여타 외국어에도 능통하다고 한다. 국정원이 선진 정보기관으로 발전하기 위해 실력 있는 인재가 몰리는 것은, 우리 나라를 위해서도 희망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국정원의 미래는 밝다고 하겠다.

나는 국정원을 지원하려는 젊은 후배들에게 국정원에 지원하기 전에 먼저, “조국에 자신의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고 타박할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말이다. 진심이다.

국정원 요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학점도 영어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애국심이다. 다른 말로하면, 사명감, 소명의식이다. 조국을 절실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국정원은 보람 있는 직장이 되기는커녕, 평생 지옥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살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국정원 요원이 될 자격이 있다.

국정원은 쉬운 직장이 아니다. 그저,“대우가 좀 괜찮다더라또는 공무원이 안정적이라더라하고 입사했다간 후회하기 십상이다. 국정원의 급여가 일반 공무원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크게 많은 건 아니다. 국정원도 엄연히 정부 기관의 하나이기에, 공무원 봉급 규정에 의해 급여를 지급 받는다. 공무원 봉급이 절대 풍족한 수준일 리가 없다.

돈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사기업을 알아보는 것이 낫다. 간혹 돈에 현혹되어 알량한 정보기관의 권력을 이용하여 허튼 짓을 하는 직원을 보게 되는데, 경험상 그런 직원은 틀림 없이 사고를 친다. 사고를 치면 자기 혼자만 망하는 게 아니라 전체 직원을 욕보이게 된다.

국정원은 정시 출근에 정시 퇴근이 보장되는 그런 직장이 아니다. 동사무소 공무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곳이다.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지 국정원 직원은 상시적으로 긴장해야 한다. 업무의 성격에 따라서는 신체적 위해(危害)를 걱정해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지난 96, 최덕근 영사 사건처럼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이다. 신문에 나진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남미의 가이아나에서는 파견관의 아내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이아나는 남미에 있는 조그만 나라인데, 북한 요원들이 국적 세탁을 위해 경유하는 곳이다. 미국에 침투하는 북한 요원들은 대개 가이아나에 잠시 체류하여 국적을 세탁했다가, 캐나다로 가서 국적을 다시 한 번 세탁한 다음 종국적으로 미국에 침투한다. 그래서, 가이아나에는 북한 요원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우리 동기들의 예만 들어도, 북측에 의해 체포 직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친구도 있고, 연변에서 공작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한 달 이상이나 중국의 지하 감방에 수감된 친구도 있었다. 신포 경수로 현장에서 한전직원으로 위장하고 오랫동안 북측의 위협 속에서 활동한 친구도 있었다. 마약사범을 검거하러 나갔다가, 조폭이 반항하는 바람에 자동차에 치여 다리를 크게 다친 친구도 있었다. 지난번 아프가니스탄에서 샘물교회 선교사들이 피랍된 사건에서 우리측 협상대표로 활약했던 소위 선글라스맨도 우리 동기다. 이 모든 일들이 모두 다 목숨을 건 위험한 활동들이다.

국정원의 업무는 대체로 폼 잡고 고상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멀다. 정상적으로 안 되는 일을, 국가이익이라는 목적에 맞추려다 보면 때로는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잘못되면 누군가에게 욕먹을 수 밖에 없다. 욕 먹는 것은 정보기관 요원의 숙명이다.

그래서, 국정원 직원은 익명에의 정열, 음지에서의 헌신에 대한 자기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국가를 위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누가 알아주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때로는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하는 회의감이 몰려올 때가 많다. 그래서, 사명감과 소명의식이란 에너지원이 없이는 버틸 수 없다.

흔히, 정보요원은 눈, , 귀는 기형적으로 발달시켜야 하지만, 입은 흔적기관처럼 퇴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천형을 진 사람들처럼 말이다. 정보기관에서는 자기 주장이란 게 있을 수 없다. 지조라는 말은 사치다. 싫든 좋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 때마다 내면적인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이 떠나야 한다. 자신을 죽여야만 살 수 있다. 부끄럽게도, 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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