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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7.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32. ‘외신 대변인’

대외협력보좌관실에 특채된 인사로 또 다른 김영О 박사가 있었다. 나종일 차장이 그를 특채했다. 김 박사의 선친과 나 차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다, 둘이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김 박사는 런던정경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거쳐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1] 그는 점잖고 신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김영О 박사는 국정원의 외신 대변인 자격으로, 해외 언론을 조정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김 박사의 해외언론 조정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 말이 해외언론 조정 업무이지, 실상은 은밀하게 노벨상 수상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외 언론의 우호적인 논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 임무는 모든 해외 언론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햇볕정책을 잘 소개하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관심 대상 언론은 일본이나 미국 신문들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구주의 신문들도 포함되었다. 물론,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등 북구라파 언론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기존의 우리 정부는 국내 언론만 챙겼지, 외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외신 업무를 담당하던 짧은 기간동안 서울에 주재하던 외신들을 아주 특별하게 대우했다. 외국의 여론에 신경 쓰다 보니 외신 기자들을 등한시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아마 서울주재 외신이 그렇게 후한 대접을 받기는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나종일 차장은 가끔 외신 기자들을 따로 초청하여 민감한 북한정보를 흘려주었다. 한번은 나 차장이 외신 기자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우리는 김정일의 어제 저녁 메뉴가 뭐였는지도 안다고 떠벌리기도 했다.

우리는 이들 외국 언론들의 취재 협조 요청에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 외신기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은 김 박사가 맡았고, 회사 안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은 내가 담당했다. 내가 해야 할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일일 외신보도 현황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국정홍보처에서 팩스로 번역자료를 받아 요약하여 보고서로 만들었다. 국정홍보처가 번역한 한국 관련 기사는 급하게 번역하다 보니 썩 좋은 번역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후배 여직원이 초고를 쓰고 내가 수정했다. 작성한 보고서는 김 박사가 나 차장에게 직접 보고했다. 

당시 외신들은 경쟁적으로 황장엽 선생을 인터뷰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황 선생의 인터뷰 일정을 조정하는 것으로 외신을 다루는 지렛대로 삼았다. 우호적인 외신에게 황 선생의 인터뷰를 먼저 시켜주었다. 반대로, 비협조적인 외신은 황 선생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나는 외신들의 취재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자료를 신속히 제공해 주었다. 일본 언론들은 특히 북한 정보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은 국정원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 영상물을 제공해 주기를 원했다. 나는 정보관리국에서 북한 관련 동영상을 구해다가 그들에게 전해주곤 했다.

외신들은 또한 국정원이 관리하는 중요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기를 원했다. 나는 무장공비 출신 인사들을 몇 차례 일본 언론에 소개해 주기도 했다. 한 번은 일본의 후지 TV 방송국 인사들을 대동하고 진해까지 내려가 강릉침투 공비 이광수 씨를 만났던 적도 있었다. 그는 무장공비답지 않게 내성적이었고, 마치 새색시처럼 수줍음을 탔다.

일반적으로 탈북 인사들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환영했다. 일본 언론은 취재원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 언론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터뷰를 하면 반드시 짭짤하게 사례비를 지급했다. 이들은 인터뷰 장소도 세심하게 고려한다. 정보는 정보대로 얻고 덤으로 촌지까지 챙기려는 우리 언론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구미 언론들도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례비를 뇌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언젠가는 산께이 신문의 구로다 기자에게 다대포 침투 공비였던 이상규 씨를 소개시켜 준 적이 있었다. 일본 연해에 북한의 괴선박이 나타나 자위대가 추격하여 총격전을 벌이고 난 이후였다. 아마 광화문의 어느 호텔에서 만났던 것 같다. 이상규 씨는 구로다 기자에게 북한의 공작선의 특징을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이상규 씨가,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빠의 정체를 알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런던정경대학은 옥스퍼드, 캐임버릿지와 함께 영국의 3대 명문 대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학교다. 주로 머리는 좋지만 돈이 많지 않은 수재들이 가는 대학이라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