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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7.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34. 김한정이란 사람

나는 김한정과 약 4개월 정도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다.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대충 어깨너머 눈치로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끼리는,“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마. 알면 다쳐!”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섬뜩한 말이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노벨상 공작은 누구도 알려고 해서도 안되고,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나는 김한정과 쉽게 가까워졌다. 서울대 출신은 그와 나밖에 없었다. 내가 국정원 직원답지 않게 운동권의 정서를 잘 이해했던 것도 우리가 가까워 지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의상 서로의 업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틈틈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회사에서 아무런 마찰이 생기기 않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굉장히 열심히 일을 했고, 또한 빈틈없이 했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도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다른 국정원 직원에게서 볼 수 없는 점을 내게서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조진오가 나에게, “HJ(김한정)가 김 선배()와 같이 일하고 싶어한다라고 귀뜸해 주었다. 자기 팀의 업무가 더 늘어나면 나를 데려가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와 김한정의 만남은 예기치 않게 빨리 끝나고 말았다. 1999 5월말, 이종찬 원장이 갑자기 경질되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부임한 천용택 원장은 이종찬 원장이 추진하던 일들을 모두 중단시켰다. 같은 육사 동기이면서도 서로간에는 라이벌 의식 같은 게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천용택 원장은 이종찬 원장이 추진하던 일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할 때가 많았다.

천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김한정을 퇴사시켰다. 그 해 5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김한정은 원장실에 불려갔다 오더니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천 원장이, “안에서 그런 일을 하는 건 위험하니 밖에 나가서 해라. 대통령께서도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퇴사하면서 천 원장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김한정은 국정원에서 나간 후,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 사무부총장 직함으로 노벨상 수상공작 활동을 계속했다. 사실, 김한정이 1999년 하반기 6개월 간 바깥에서 작업한 활동이 후에 노벨상 수상의 초석이 되었다.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수상한 것도, 동티모르의 호르타 장관과 관계를 턴 것도, 그리고 짐작되기로는 북한과 비밀회담을 추진한 것도 그 시기였다. 

김한정은 1999 7, 김대중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기는 데 성공했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던 포글리에타가 적극 도와 준 결과였다. 그는 당시 클린턴 정부에서 주 이탈리아 미국대사였다.[1] 그는 오랜 동안 김대중의 열성 지지자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 김대중이 사형을 면하고 사면 받아 미국으로 떠날 때, 그가 한국에 와서 동행했다고 한다.

김한정은 또한 동티모르에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일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그는 1999년 하반기에 동티모르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동티모르에 민간 여객선이 취항하기 전부터 상록수 부대의 군용기를 타고 갔다. 이렇게 해서 동티모르에 군대를 파견하고 국회의사당을 건축해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라모스 호르타는 김대중에게 그 해 노벨상 추천장을 써주었다. 2000 1월 말, 호르타 일행은 청와대를 방문하여 노벨상 추천장에 최종 서명을 했다. 매년 노벨상 추천장의 마감시한은 2 1일이었다. 마감 직전에 서명해준 것이었다. 김한정은 이 비밀스런 거래의 막후 밀사 노릇을 했다. 이번에도 조준오가 내밀한 심부름을 했다. 

내가 김한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99 8월의 어느 날이었다. 김한정은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획득하고 나서,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같이 일했던 젊은 직원들을 불러 강남의 어느 룸살롱에서 크게 한턱 내었다. 그는 이때 이미 김대중의 신임을 완전히 회복한 것처럼 호기를 부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대통령이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상금을 내게 다 맡겼다며 돈을 펑펑 써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면 운동권 출신의 일면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는 있었다. 그는 술이 잔뜩 취해, 봉사하는 아가씨들에게 팁을 뿌리면서도,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이 생각난다. 술집 얘들에게 이렇게 많은 팁을 주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주절댔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지난 2000 12월 오슬로에서 열린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 외국인으로서는 유이하게 포글리에타와 라모스 호르타가 초대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