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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5. 문민정권의 뒤안길 II

23. “뉴스로 뉴스를 덮어라”

문민정권의 출범은 그야말로 창대했다. 애초에 문민정권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민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사정을 칼날을 들이 대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온 사회에 겁 없는 망나니의 칼춤이 어른거렸다.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군대 내 사조직과 특정 인맥을 과감하게 잘라 냈다. 엘리트 장교가 쫓겨 나간 자리엔, 또 다른 부패한 인물들이 들어섰다.

비록 기득권 층의 반발과 개혁세력을 준비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법조계와 교육계 등 사회 각 분야의 뿌리 깊은 고질병을 도려내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시도한 점은 인정해줄만 했다. 몇 가지 부분에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민주화에 큰 진전을 이루어 냈다.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 공개 같은 것들은 문민정권이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문민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개혁정책 덕분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 정권이 둘째 해를 맞으면서 상황이 돌변했다.전국 각지에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마치 겨우내 얼어 붙었던 축대가 봄이 되면서 무너져 내리는 형국이었다. , , 공뿐만 아니라, 지하에서조차 연쇄 다발적 사고가 일어났다. 구포에서 열차 사고가 일어 나더니, 격포에서 여객선 사고가 이어졌다. 마포에서는 지하철 공사장에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고 행렬은 1995 6 29,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내려 앉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나는 곳은 모두 자 지명을 가진 곳이었다. 소위 카더라통신이 난무했다. “다음 번에는 김포에서 비행기 사고가 난다더라”, “영등포에서 지하철 사고가 터진다더라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사회가 어수선해지면서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전직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일어났던, 조창호 소위의 귀환에 대한 얘기는 좀 소개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일련의 사고 행렬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성수대교 붕괴사건이었다. 1994 10, 멀쩡하던 다리가 어느 날 아침에 중간이 끊어져 내려 앉으면서 수 십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묘책을 찾아야 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더 큰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탈북 국군포로였던 조창호 소위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사실 안기부는 애초부터 조창호 소위가 탈북하여 중국을 통해 귀환을 시도하고 있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그저 팔짱을 끼고 지켜 보고만 있었다.

조창호 소위는 출신 집안이 괜찮았다. 서울과 미국에 사는 친지들이 그의 탈북을 돕고 있었다. 조 소위의 조카가 중국 현지에까지 들어가 조 소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의 최우석 기자였다. 정보기관이 해야 할 일을 일개 언론사의 기자가 대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초 조 소위 일행은 조그만 통통배를 이용해 서해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첫번째 시도는 파도가 너무 높아 실패하고 되돌아 갔다. 두번째 시도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실종되고 말았다. 김덕 부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창호 소위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안기부는 수산청의 어업지도선을 총 동원하여 서해를 이 잡듯이 뒤졌다. 수색작업은 수산청을 담당하던 최 모 서기관이 주도했다. 총력을 기울여 수색한 끝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사흘만에 조 소위를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거창한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1호가 탄생한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초 조 소위 집안에서는 북쪽에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그들은 북쪽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한 달만이라도 공개를 좀 늦추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북쪽의 가족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것은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그 후 조창호 소위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시절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몇 차례 워싱턴에까지 와서 북한의 참상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인사라도 드리려고 그의 숙소를 찾아갔지만, 끝내 만나 보지는 못했다. 몇 년전,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많은 인생살이에서 대한민국에서의 그의 말년이 얼마나 보상이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문민정권 시절에는 임기응변의 땜질식처방이 잦았다. 사건이 터지면 더 큰 사건을 만들어, 뉴스로 뉴스를 덮으려 했다. 지난 97년 황장엽 선생의 망명사건도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문민정권은 정권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면서 노동법과 금융관계법을 날치기로 개정하려다 실패했다. 정국이 경색되면서 야당은 김현철 문제를 들추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철 사건이 엉기면서 정권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정국을 전환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황장엽 선생의 망명은 그런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초보적인 공작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라면, 황 선생 같은 거물은 북측 깊숙이 심어두고 오래도록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하다 보니 허급지급 데려 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황 선생님과 김덕홍 선생의 가족이 애꿎게 희생되었다. 나는


통일부의국군포로 탈북 귀환 현황' 자료에 의하면, 지난 1994 ~ 2008년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 가운데 74명이 탈북해 귀환했다. 조창호 소위의 탈북이 효시였다

 황 선생의 망명에 대해서는 월간중앙 2001 10, 11월 호 황장엽 망명 미스터리제하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