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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무기도입 비리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 2003년, 특검이 허무하게 끝나고 그 해 연말이 됐다. 갑자기 청와대에 소속된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무기비리에 대해 수사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 정권에서 정신을 차리고 뭔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가 싶어 한 때나마 약간의 희망과 설렘이 다시 일었다. 참여정부에 참여한 부산 출신 인사들이 뭔가 제대로 하려는가 보다고 기대되었다. 그래서, 이호철 민정 비서관에게 e-메일을 보내, “수사에 협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도 즉각 관심을 표명해 왔다. 몇 차례 e-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국방비리만 근절하면 국방예산 10% 증액이 온다는 마음으로 타협을 하지 않고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건너 가겠다”까지 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후 외교부의 청와대 항명사건을 처.. 더보기
54. 대북송금 특검과 정몽헌 회장의 타살 의혹 다시 대북송금 얘기다. 정권이 바뀌고 3월로 접어들면서, 대선에 패배하여 주눅이 들어 있던 한나라당이 서서히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대북송금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을 발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임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을 승인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특검이란 승부수를 가지고 김대중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전, 현직 대통령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듯 했다. 최근 발간된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는 이 때 노 대통령이 특검을 받아들이게 된 사연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1] 그 책의 설명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송금사실을 인정하면 통치행위론으로 무마하여 넘어갈 수 있었는데, 끝내 송금하실을 몰랐다고 우겼기 때문에 통치행위론을 주장할 근거가 .. 더보기
53. 양심선언의 언저리 노벨상 공작과 대북송금에 대한 나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가자 애국적인 네티즌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표명해 주었다. 대선 패배에 의기소침해 있던 그들에게는, 마치 청량제 같은 정보였을 것이다. 여러 인터넷 신문들이 나의 글을 전제하고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다. 특히 인터넷 독립신문과 사이버뉴스24라는 매체가 열심이었다. 개인 네티즌들이 이 글들을 퍼다 날랐다. 설연휴가 지나자 일간지들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특히,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후속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모 전직 장관급 인사의 – 아마도 이정빈 전 외교장관이라고 짐작되지만 – 언급을 기사화 하면서,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을 기정 사실화하는 보도를 내 보냈다. 역시 앞뒤 안가리고 나가기로는 동아일보를 따를 언론이 없었다. 동아는 또한 동티모.. 더보기
52. 양심선언을 발표하다 2002년 12월 19일, 이변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회창 후보는 노무현 후보에게 석패했다.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보수표 “2인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와 한나라당의 패배는 안일함 때문이었다. 김칫국부터 마신 게 패인이었다. 이회창 후보자 자신은 일찌감치 대세론에 안주하였고, 그의 측근들은 정권 교체 후 차지할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듯이 보였다. 모두가 한여름밤의 꿈에 젖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회창 후보는 5년 전 패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한 이유는 보수진영의 분열과 DJP 연합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김종필 총재와 이인제 후보를 끌어안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2002년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는 보수 .. 더보기
51. “내보다 더 마이 아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 왔다. 나는 내가 준 정보를 이병기 특보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청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중전화로 이 특보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직접 한 번 들어갈까요?”하고 물었다. 그는 선뜻 “들어 오라”고 했다. 대선을 3주 정도 남긴 2002년 11월 28일, 나는 급히 비행기표를 끊어 서울로 향했다. 그 때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나는 학점 같은 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한나라당 당사를 찾았다. 도착해 보니 마침 그 날이 한나라당이 1차 도청자료를 폭로하는 날이었다. 한나라당 특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나라당의 젊은 보좌관들이 저희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그들은,“우리들은 너무 신사적이다. 민주당 놈들이 이런 자.. 더보기
50. “15억 달러랍니다” 나는 그때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피신한 후 커뮤니티칼리지에 등록하고, 틈틈이 미국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김대중 측이 김대업을 앞세워 더러운 공작을 꾸미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도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이라도 한나라당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광복절인 2002년 8월 15일, 나는 한나라당의 이병기 특보에게 인편으로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임동원의 간첩혐의에 대해 은밀히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윤여준 특보와 접촉해볼까 생각을 했으나, 이병기 특보가 더 적합한 사람 같아 보였다. 국정원 차장을 지낸 사람이니 노벨상 공작 등에 대해 이해가 더 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회창 후보 측이 김대중 측의 비열한 공작.. 더보기
49. 미국으로 피신하다 2001년 여름, 나는 임동원을 추적하는 일이 나의 혼자 힘으로는 턱 없이 벅찬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았다. 우선 생각나는 사람이 고향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었다. 그를 찾아가 임동원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김용갑 의원은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그의 부인도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힘없이 돌아 섰다. 미국에서 9/11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동아일보가 김형Ο 경제단장의 뇌물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검찰이 이용호 게이트 수사에서 사채업자인 이경자로부터 김형Ο 단장이 5,000.. 더보기
48. 북풍, 세풍, 안풍 김대중 정권 초기에 일어난 『북풍사건』은 좀 언급할 가치가 있을 법하다. 북풍사건은 당시 권력을 잡은 측의 일방적인 매도로 세상에 너무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당시의 사건들을 하나씩 복기해 보면 북풍사건이란 것이, “김대중 정권에서 주장한 것처럼 허무맹랑한 정치공작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풍사건이란 지난 1997년, 안기부가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대선판에 북한을 끌어 들이려 시도했던 일련의 정치공작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른바 윤홍준 기자회견 사건, 오익제·김병식 편지 사건, 총풍사건 등이 북풍사건의 주요 줄거리였다. 안기부의 공작이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아무런 배경이 없는 허무맹랑한 얘기만은 아니었다. 윤홍준 기자회견 사건이란,.. 더보기
47. 쪽방에 갇힌 대붕 회사를 나오기 하루 전날, 나는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황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퇴사하고 나면 다시는 만나 뵐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략1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황 선생님 담당관인 유덕Ο 선배에게 특별히 청을 넣었다. 나는 황 선생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친분은 없었으나, 2000년 1월에서 6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에 개최되었던 황 선생님의 인간중심철학 세미나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곶감 한 접을 사 들고 갔다. 황 선생님이 곶감을 좋아한다는 것은 황 선생 관리팀에 있던 동기 Ο일건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전 해 추석 때에도 찾아가 안부를 묻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길래, 곶감을 한 접 사서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황 선생님은 『개.. 더보기
46. ‘김대중의 심장에 비수를…’ 2000년 10월 28일, 나는 7년 10개월간 몸 담았던 국정원을 떠났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막연히 '잘되겠지'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이 겪은 정치적인 고난의 의미를 잘 되새겨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완성하고, 고질적인 지역감정 문제도 극복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나의 그런 바램이 순진한 희망으로 판명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분노로 변해 갔다. 나는 깊은 회의와 좌절감에서 빠져 들었다. 갑갑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사표를 생각하게 됐다. 국정원은 이직률이 매우 낮은 직장이다. 일반 사회의 직장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다른 정부 부처 공무원들과 비교해도 국정원의 이직률은 가장 낮은 편이다.. 더보기
45. 브레이크 없는 호남선 인사 열차 김대중 정권 시절의 국정원의 인사편중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도 다소간의 지역편중 인사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김영삼 시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인사 편중이 자행되었다. 전라도 출신 인사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마치 권력의 화신인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50년간 굶었으니, 5년 동안 포식하자”며 덤벼드는 아귀 떼 같았다. 김대중 정권 시절의 지역편중 인사 조짐은 이종찬 원장 시절에 이미 시작되었다. 정권 초기부터 국정원 내에서는 속칭 복도통신(?) 등을 통해 “성지순례”와 “어학연수”를 갔다 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농담처럼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대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 였지만, 전라도 출신들이 끼.. 더보기
44. 천용택 국정원의 막가파식 행태 1999년 5월 말, 새로 부임한 천용택 원장은 이종찬 원장이 추진하던 사업을 모두 중단시켰다. 두 사람은 육사 동기였는데, 둘 사이에 무슨 악연이 그리 깊었던지, 천 원장은 감정적으로 이 원장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원장이 추진하던 노벨상 공작도 전면 중단시켰다.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 등장한 많은 벼락 출세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개념 없고 저열한 인물이었다. 지시 사항을 들으면 그 사람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식한 원장일수록 보고서에 트집을 많이 잡는다. 자기 자신의 무식함은 탓하지 않고 글쓴 사람의 유식함을 비난한다. 천 원장은, “보고서에 한자를 줄여라”거나, “경제보고서는 쉬운 용어를 쓰라”거나, “모든 보고서는 16줄 이내로 줄여라”라는 등의 엉터리.. 더보기
43. 이종찬 국정원의 개혁의 망치소리 이종찬 원장은 취임하자마자, “국정원을 대대적으로 수술하겠다” 고 나섰다. 청사 내에는 개혁의 망치소기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먼저, 문패부터 갈아 치웠다. 안기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없애고, 국가정보원이라는 다소 소박한 이름으로 변경했다. “국민들에게 서비스하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대대적인 숙청과 조직개편이 뒤 따랐다. 하드웨어를 수리하는 작업과 함께 소프트웨어를 교체하는 작업도 병행됐다. 국정원 내외의 이미지 개선 작업이 요란스레 진행되었다. 우선 청사 정면에 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운치 있던 부훈석을 내다 버렸다. 그 자리에는,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멋대가리 없는 부훈석이 새로 들어 섰다.[1] 뜬금없이,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본받는다”.. 더보기
42. ‘악마적인’ 사기꾼 김대중 정권 시절에 국정원 내부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기록해 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듯하다. 이 시절 국정원 내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여러 일들을 되돌아보면, 그들이 말한 국정원 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황된 구호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김대중 정권은 국가정보원이라는 공적 기관을 완전히 사설 흥신소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권력을 잡은 전라도 출신들은 국정원이라는 조직을 철저히 사유화했다. 김대중 자신은 국정원을 “반역의 도구”로 이용했고, 그의 가족들은 “범죄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김대중 정권은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사기와 협잡으로 일관했다. 대북송금, 불법도청, 그리고 각종 게이트는 이러한 범죄행위 가운데 일부 마각이.. 더보기
41. 남북교류 현장의 이모저모 각설하고, 전략국에 전입하자마자 나는 제 1차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준비하는 상황실에 배속되었다. 상황실장은 김만복 과장이 겸했다. 이 행사는 남북한이 어떻게 교류하는 지를 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황실에서의 행사준비는 전략1과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부서에서 행사 진행요원으로 차출되어 파견 나온 수십 명의 직원들도 같이 근무했다. 수송, 통신, 안전 등 행사지원 부서에서 파견나온 직원도 있었고, 홍보를 담당하기 위해 국내 부서에서 언론을 담당하러 나온 사람도 있었다. 행사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독일에 주재하는 파견관으로부터, “류미영 천도교청우당 당수가 북한의 인솔단장으로 올 예정이다”라는 첩보가 들어 왔다.[1] “독일에 있는 류미영의 아들이 북한의 정보기관 고위 간부인.. 더보기
40. 통일운동가들에 대한 단상 대북 첩보 가운데 가끔은 혼자 읽기 아까운 것도 더러 있었다. 그 중에서 황 모 씨에 대한 첩보는 좀 소개할 만 하다.[1] 황 모 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좌파 문학인이다. 나는 국정원에서 좌파 인사들의 도덕적 일탈과 위선을 알게 되어 실망한 적이 많았는데, 그도 그 중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그는 1980년대 말 무단으로 밀입북 했다가 돌아온 후 투옥되었는데, 요즘도 반성은커녕,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내가 읽은 첩보에 의하면, 북측의 모 인사는 황 씨를,“썩어 문드러진 자본주의의 도덕관념을 가진 XX”라며 경멸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이랬다. 그가 이른바 통일운동을 한답시고 북한에 체류 중일 때, “북측 요원들에게 사흘 밤이 멀다 하고 아리따운 처녀를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더보기
39. 대북전략국 전략1과 대북전략국으로 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전략국장은 서영교 씨였다. 나는 감찰실에서 전략국을 담당하고 있던 친구 이창О에게, “전략1과에 가고 싶으니, 서 실장에게 얘기 좀 잘 해라”라고 부탁했다. 예상한대로 서 실장은 감찰실 수집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자리를 차지하는 중견 간부도 아니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략국은 그때 대북 관련 행사가 폭주하는 바람에 인력이 태부족한 상태였다. 전략1과는 대북전략국의 핵심과였다. 당시에는 아직 회담조정관실이 설립되기 이전이라 대북 협상의 기획과 뒷조율은 모두 이 과가 도맡아서 했다. 과장은 김만복 씨였다. 김만복 과장 이전에는 전옥현 씨가 했다. 그 전에는 서영О .. 더보기
38. “니가 그리 잘 났냐” 그 즈음 나의 퇴사 결심을 확고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는 출신 지역 때문에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불쾌한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권진호 차장이 부임해 왔을 때, 나는 그의 보좌관으로 내정되어 그에게 부임인사까지 마쳤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인사가 없던 일로 되었다. 아마 나의 출신 지역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진로문제에 대해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었는데, ‘퇴사할 때 하더라도, 남북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0년 7월경 대외협력보좌관실이 해체되자전략국으로 전출해 주기를 행정과에다 요청했다. 나의 전출 희망을 접한 행정과는 황당해 했다. 국정원.. 더보기
37. 국정원, 햇볕의 비탈에 서다 그 즈음 나는 퇴사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모두 새천년의 희망에 들떠 있던 와중에, 나는 김대중 정권의 행태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햇볕정책이란 이름의 기만적인 대북정책이, 노벨상을 타기 위한 속임수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북한의 참상을 하나 둘 확인하게 되면서, 이 위선적인 정권에 구역질이 더해 갔다. 마음 속에서,‘과연 자신의 노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 이익을 희생시키는 대통령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민족의 이익을 배신하고 반역의 종범 노릇을 하는 조직에 언제까지 몸담아야 하는지?’, ‘간첩이라는 의심이 드는 원장 밑에서 계속 일해야 하는지?’이런 저런 회의감이 쉴 세 없이 밀려왔다. 딱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더보기
할일을 잃다 99년 5월 말, 천용택 원장 부임하여 노벨상 공작을 전면 중단시키자, 우리는 졸지에 할 일을 잃어 버렸다. 겉으로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시늉을 냈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두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렸다. 사무실 멤버들은 하나 둘씩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같다. 먼저, 같이 일하던 박 선배가 원장 통역관 자리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잘렸다. 그는 어느 날 통역하려 들어갔다가 원장 비서실로부터“오늘부터 통역을 그만두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졸지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잘린 것이다. 그의 후임으로 정협과에서 일하던 전문직 여자 통역관이 임명되었다. 그녀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통역을 바꾼 이유를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그 이유라는 게 기가 막혔다. 천 원장이 “통역의 악센트를 마음에 안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