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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9.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I

45. 브레이크 없는 호남선 인사 열차

김대중 정권 시절의 국정원의 인사편중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도 다소간의 지역편중 인사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김영삼 시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인사 편중이 자행되었다. 전라도 출신 인사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마치 권력의 화신인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50년간 굶었으니, 5년 동안 포식하자며 덤벼드는 아귀 떼 같았다.

김대중 정권 시절의 지역편중 인사 조짐은 이종찬 원장 시절에 이미 시작되었다. 정권 초기부터 국정원 내에서는 속칭 복도통신(?) 등을 통해 성지순례어학연수를 갔다 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농담처럼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대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 였지만, 전라도 출신들이 끼리끼리 모여 다 해쳐 먹는현실을 빗댄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종찬 원장 시절에는 전라도 출신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행세하지는 못했다. 이종찬 원장이 국정원 내부를 잘 아는 데다,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에 전라고 출신들은 드러내 놓고 설치지는 못했다.

물론, 이종찬 원장 시절에도 인사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측근들을 중용했다. 이 원장은 자신의 수행비서와 의전비서를 외부에서 데리고 들어왔다. 내가 겪어본 원장 중에서 수행과 의전 비서를 모두 외부에서 데리고 들어온 것은 이 원장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질이 검정되지 않은 좌파 성향의 학자들을 십 수명씩이나 특채했다. 그나마 수십 명의 여당 인사들의 천거 압력을 거부한 것이 그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 이미 국정원의 사용(私用)의 단초가 열린 셈이었다. 

그러다, 천용택 원장이 부임하자마자 사정이 급격하게 돌변했다. 이때부터 전라도 출신들은 형님”,“아우하면서, 사실상 모든 인사를 독점하기 시작했다. 인사 명령지는 온통 전라도 출신 일색으로 변했다. 국정원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호남선 열차처럼 난장판이 되어 갔다.

천 원장은 국내 차장으로 엄익준 씨를 임명했다. 엄익준 차장은 국내 부서에 대한 경험은 일천했는데, 예상외로 국내 담당 차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엄익준 씨는 김영삼 정권에서 3차장(북한 담당)이었다.

그는 대선 때 김대중 측에 북풍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그가 제공한 정보 덕택에, “김대중 측에서는 안기부의 북풍공작을 사전에 알고 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던 조직을 배신하고새로운 정권의 창출에 기여한 개국공신이었던 셈이다그는 또한 정권이 바뀐 후에는소위 국정원의 살생부를 작성한 장본인으로 지목 받던 사람이기도 했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료들의 등 뒤에 칼질을 해댄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보도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이종찬 원장에게 엄익준 씨를 기용해 달라고 두 차례나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종찬 원장은 조직을 배신한 사람을 기용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천 원장은 전 감찰실 직원이었던 김홍О 씨를 복직시켰다. 김홍○ 씨는 대선 직전 근무지를 무단 이탈하여 기자회견을 시도했다가 파면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정권 교체에 대단한 공을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기조실장으로 컴백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 원장은 김 씨에 대해서도 조직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복직 시키지 않았다.

월간조선은 1999 9월호에서 이러한 국정원의 인사 난맥상을 상세하게 보도했다.[1] 국정원 내부의 인사문제가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보도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회사 내 누군가가 기자에게 인사 명령지를 통째로 넘겨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그 기사를 읽으면서, “익명으로 처리된 동그라미를 누가 많이 채워 넣을 수 있는지?”내기를 했다. 그 기사는 국정원의 모든 정보라인이 모두 전라도 출신으로 채워졌다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사실이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청와대로 정보를 배달하는 조준오의 이름은 아직 월간조선 기자에게 노출되지 않았다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사실, 이전 정권에서는 인사 편중이 그렇게까지 악랄하지는 않았다.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표시나지 않게 눈치껏 하려고 했다. 김영삼 정권까지만 하더라도, 전라도 출신이라도 노골적으로 동교동 쪽에 줄을 대지 않으면, 능력에 따라 진급하는 데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엄익준, 최규백, 김은성 같은 간부들이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때는 사정이 변했다. 인사문제에 관한 한 전라도 출신 인사들은 체면이고 염치가 없었다. 정권이 바뀐 후, 전라도 사람들은 인사 관련 핵심 보직부터 장악했다. 각 부서의 인사과, 총무국 인사과, 감찰실 평가계와 수집과 등에는 새로 전라도 출신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인사 편중은 인사과 보임팀장이었던 김영О라는 사람이 주도했다. 그는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후, 정규과정 21기로 국정원에 입사한 엘리트 요원이었다. 그는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 출신이었는데, 그는 고향의 역사를 정리한 섬으로 흐르는 역사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국내부서에서 활동하다 동교동으로 정보를 유출한 혐의가 발각되어 강원지부로 전보되었다고 한다. 그는 강원지부에서 근무하면서 권노갑 등 동교동 인사들에게 줄을 댔다고 한다.

또한, 그는 국정원의 살생부를 실질적으로 작성한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김영О가 각 부서의 젊은 직원들을 선발하여 호텔에 합숙하면서, 문제의 살생부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권이 바뀌자 마자 서울로 올라와 인사과 보임1팀장이라는 중책을 차지했다.

인사과 보임팀장은 국정원 내에서 요직 중의 요직으로 인식된다. 마치 조선시대 이조전랑과 비슷하다. 직급은 높지 않지만, 국정원의 모든 인사를 틀어쥘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니, “모 기조실장은 일개 팀장에 불과한 보임계장에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식 이하의 인사파행이 버젓이 자행되었다. 그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승진연한이 지난 전라도 출신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정원 내규의 진급제한 조항까지 자기들 마음대로 뜯어 고쳤다. 이들은 구 정권에서 자신들이 능력이 안돼 진급 못한 것을, 지역차별로 인해 진급하지 못한 것이라고 호도했다.

당시 박홍О 해외공작국장은 타 부서의 인사에 관여하려 시도하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는 우명О 국제정책실장에게 자신의 광주일고 후배인 김 모씨를 부이사관으로 진급시키라며 압력을 넣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지만, 나중에 김 모씨는 국제정책실 행정과장으로 진급했다.

해외공작국의 이성О 행정과장은 기수를 고려하여 러시아 과에 있는 21기 경상도 출신 직원을 서기관으로 먼저 진급시키려다, 같은 과의23기 전라도 출신직원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23기 직원이 승진했다. 눈치 없이 세상 바뀐 줄 몰랐던 그는, 행정과장 자리에서 쫒겨나야 했다.

  이와 같이, 인사가 있을 때마다 전라도 출신들은 약진을 거듭했다. 최고위직인 관리관은 물론이고, 이사관과 부이사관 승진 자리는 거의 전라도 출신들이 도맡아 차지했다. 이들은, “고위직을 주려고 해도 줄 사람이 없다며 자기네들끼리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경상도 출신이 부이사관 이상의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경우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서기관 승진 시에도 네 명중 세 명은 전라도 출신으로 채우고 한 명 정도만 타 지역 출신을 적당히 끼워 넣는 식이었다. 해외 파견관 같은 알짜배기 자리는 능력에 관계 없이 전라도 출신들이 싹쓸이 했다.

심지어 이들은 하위직은 사무관 진급에서도 지역 차별을 했다. 일 잘하는 직원도 전라도 출신이 아니면 떨어뜨리고, 반면 전라도 출신은 능력에 관계 없이 무조건 진급시켰다. 참으로 개탄할만한 현상이 버젓이 벌어졌으나, 누구 한 명 이에 대해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은 극심한 인사편중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권에 대한 직원들의 민심이반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불만을 표출했으나, 차츰 지역에 관계없이 모든 직원들이 인사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됐다. 정권 후반으로 가면서 아예 체념하는 분위기로 변해 갔다. 

정권이 바뀌자 국내정보 부서에서는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작되었다. 특히 국내정보 수집부서의 정치수집과 거의 전부 물갈이가 되었다. 정권 교체 후 신임 정치과장은 임정О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후 김대중 정권 내내 국내정치 수집부서의 핵심 인물로 역할을 했다.

임정О 과장은 취임 일성으로 기존 직원들에게, “정치과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스스로 알아서 떠나지 않으면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과장의 요구에 못이겨, 정치과 요원들이 하나 둘씩 떠밀려 자리를 떴다.

이들 가운데 미운털이 많이 박힌 직원들은 지부로 쫒겨 가야 했다. 황화О 직원은 충북지부로, 강욱О 직원은 경남지부로, 그리고 김채О 직원은 제부지부로 각각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들이 떠난 빈자리는 전라도 출신들로 채워졌다. 정치과만 그런 게 아니고, 경제과나 다른 과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김영삼 정권 때까지 국내 부서에는 전라도 출신이 드물었다. 전주고 출신은 몇 명 있었지만, 전라남도 출신은 거의 없었다. 다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저런 차별을 경험하고 일찌감치 다른 부서로 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국내부서에 남아 있던 전라도 출신들도 모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권이 바뀌자, 광주지부에 있던 전라도 출신 직원들이 대거 상경했다. 최규백 광주지부장과 김형윤 광주지부 정보과장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올라오자마자 국내정보 부서의 핵심보직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광주지부는 전체 직원이 대거 올라오다 보니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국정원 내부 전산망에다 광주지부 근무 희망자를 공개 모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대중 정권은 국정원의 공채 요원을 선발하는 데에도 지역편중 인사를 했다. 원래 국정원 안에서 전라도 출신은 소수다. 웬일인지 경상도 출신들은 인구비례보다 많았고 전라도 출신은 인구비례보다 적었다. 아마 몇 십 년간 경상도 정권이 계속되면서 그런 경향이 심화되어 온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소위 종자론이니 꿈나무론이니 하면서 전라도 출신 지원자들을 우대했다. 그들에게는 부당하게 가산점을 주는 편법을 썼다. 국정원의 인적 구성 비율을 정상화(?)하기 위해 전라도 출신 지원자에게 특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폈다. 심지어, 전혀 자격이 없는 젊은이를 영부인 이희호의 조카라는 이유로 특채하기도 했다. 

한편, 전라도 출신 간부들 사이에 자리다툼도 치열했다. 처음에는 전남 출신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한동안 목포 출신 성골들과 광주 출신 진골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이는 남촌사건에서 목포상고 출신들이 일거에 묵사발이 되면서 자연히 소멸되었다.

그 후 광주지역 출신들 간에 경쟁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동문별로 일고파다, 광고파다, 광상파다 하면서 서로 분열하였다. 같은 광주일고 출신들 간에도 분쟁이 일어났다. 기조실장 자리를 놓고 최규백 씨와 박홍○ 씨가 서로 으르릉거렸다. 이들은 둘 다 광주서중 출신이었는데, 최씨가 1년 선배였다. 최규백 씨는 국내정보 기획판단국장이었고, 박홍О 씨는 해외공작국장이었다. 결국 기조실장 자리는 최규백 씨에게 돌아갔다.

김대중 정권이 후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소위 『남북전쟁』이 벌어졌다. 신건 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북세력과 김은성 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세력이, 서로 피 티기는 전쟁을 벌였다. 이 싸움은 2001년 말, 진승현 게이트가 터진 후, 김은성씨가 구속되는 것으로 끝났다.

신건 원장은 재임 중에 전주고 후배들을 중용했다. 특히 국내정보 부서 간부들은 거의 전주고 출신으로 채웠다. 정권이 끝나갈 즈음, 그는 전주고 동문 간부들을 불러 고별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고 모 씨는 후배를 챙겨주지 않았다며 신 원장에게 술잔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국정원에서 선후배간의 의리라는 게 그런 건가 보다. 

사실, 신건 원장과 김은성 차장 간의 골육상쟁은 김대중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는 시발점이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정성О 과장이 김홍일에게 부탁하여 김은성 기판국장을 국내정보 차장으로 승진시켰다고 한다. 한편, 김홍일의 최측근인 정학모가 신건 전 차장을 국정원장으로 밀었다고 한다.

당시 정성О과 정학모는 전라도 깡패 세력을 양분하고 있다는 말이 돌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둘은 사이가 극히 좋지 못했다. 김은성 차장과 신건 원장은, 어쩌면 이들 양 정씨의 대리전을 벌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성О 씨는 1998년도에 제주도에 잠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이 때 김홍일 씨가 전라도 깡패들을 대동하고 제주도로 휴가를 갔다고 한다. 이 때 정성О은 김홍일의 무릎을 잡고, “형님, 깡패들이랑 어울리지 마세요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2]  정성Ο이 언급한 J씨가 정학모이다.  

김대중 정권에서 살아 남은 정성Ο 씨는 원래 엄익준 차장의 심부름을 했다. 어린 벤처 사업가 진승현의 돈으로 김홍일과 김대중의 사생아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소위 특수사업도 실상은 엄익준 차장이 지시한 일이었다. 엄 차장이 예기치 않게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김은성 씨가 그의 차리를 대신했는데, 정성Ο과 김은성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본 김은성 씨는 세간에 알려진 만큼 부패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친한 동기와 선배가 그의 보좌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나는 가끔 그의 사무실에 놀러 갔는데, 그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아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편이었다. 본의 아니게 진승현게이트에 말려 들어 그가 진승현 게이트의 원흉인 것처럼 알려졌으나 사실은 모든 죄를 뒤집어쓴 면이 있다. 신건 원장 측의 교묘한 언론플레이에 당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 정권 내내 전라도 깡패들이 온 사회에 득세했다. 정권 교체후 전라도 조폭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크고 작은 이권에 개입했다. 전통적인 요식업뿐만 아니라 건설업, 부동산, 사채시장, 벤처기업 등 각 방면으로 진출했다. 심지어 영화산업에도 투자하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현직 검사가 온통 깡패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다가 자신이 해임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3]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월간 조선 19998월 호 우종창 기자가 쓴 끊이지 않는 국정원의 지역 인사 시비제하 기사 참조.

정성○ 씨와 정학모 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1.11.20 자 조선일보 국정원 현 간부도 진승현 게이트 연루제하 정성○ 씨 인터뷰 기사 참조.

대한매일 2001.10.19. “벤처 사건마다 조폭 공동주연” 제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