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원장은 취임하자마자, “국정원을 대대적으로 수술하겠다” 고 나섰다. 청사 내에는 개혁의 망치소기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먼저, 문패부터 갈아 치웠다. 안기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없애고, 국가정보원이라는 다소 소박한 이름으로 변경했다. “국민들에게 서비스하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대대적인 숙청과 조직개편이 뒤 따랐다.
하드웨어를 수리하는 작업과 함께 소프트웨어를 교체하는 작업도 병행됐다. 국정원 내외의 이미지 개선 작업이 요란스레 진행되었다. 우선 청사 정면에 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운치 있던 부훈석을 내다 버렸다. 그 자리에는,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멋대가리 없는 부훈석이 새로 들어 섰다.[1]
뜬금없이,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본받는다”며, 광개토대왕비의 실물모형을 건립하기도 했다. “국정원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면서, 청사 강당에 신채호 선생의 영정도 내다 걸기도 했다. 청사 바깥에는 최덕근 영사를 비롯한, 순직 요원들을 기념하는 보국탑도 새로 세웠다.
이러한 작업과 병행하여 국정원의 홍보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기존의 공보기능을 대폭 보강하여 공보비서관실을 새로 만들었다. 국정원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인터넷 홈페이지도 새로 깔끔하게 단장했다. 국가정보관을 새로 지어 민원인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영화 『쉬리』를 제작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군 시설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가 하면, 현행법상으로 수입해 들여올 수 없는, 총기류 등 영화 소품들을 수입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도 했다. 특히 영화의 현장감을 높일 수 있도록, 북한의 특수부대 출신 귀순자 안 모씨를 어드바이저로 투입해 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영화 대본까지 손질해 주는, 과잉 친절을 베풀려고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제작자 측에서 현명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국정원의 쉬리의 제작지원은 “대성공”으로 평가되었다. 그 후, 국정원은 여러 편의 방송 드라마에 제작 편의를 제공했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개혁작업은 한바탕 “쇼”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에 분칠만 약간 하다 그친 수준이었다. 되돌아 보면, 김대중 정권의 국정원은 정보기관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기는커녕, 정권에 더욱 철저하게 예속된,“정권의 창녀”역할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개혁의 과정에서 오히려 부작용만 크게 불거졌다. 검찰에서 파견되어 온 소 모 검사의 지휘 아래 피 뭍은 칼날이 번뜩였다. 수백 명의 직원들이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대거 잘려 나갔다. 이 중에는 일백여 명의 간부급 직원들도 포함되었다. 미림팀을 이끌던 공운О 팀장도 이때 옷을 벗었다.
인적 청산은 국정원 내 지역감정의 뇌관에 불을 당긴 것이었다. 국정원 청사 내에 흉흉한 소문이 을씨년스럽게 돌았다. 잘린 간부들 대다수가 경상도 출신이었다. 해임된 간부 중에서 전라도 출신은 단 세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정성О 씨 같은 사람은 김홍일에게 구명하여 살아 남았다.
해임된 간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강제 해직되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적지 않은 액수의 명예퇴직 위로금을 거부하고, 회유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국사모』와 『국강투』 같은 조직을 결성하여, 끈질기게 법적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국정원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되었다. 국정원 내 지역간 갈등과 분열은 고착화되어 갔고,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가 되어 버렸다.
김대중 정권 초기에 벌어진 소위 『5.29호실 사건』은 몇 마디 언급할만한 일인 것 같다.[2] 김대중 정권 초기의 국정원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12월,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일단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본청의 529호실을 급습했다. 국정원 사정에 밝은 정형근 의원이 작심하고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었다.
이 한나라당판 “국회습격 사건”으로 인해, 국회 내에서 마치 조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살풍경이 연출되었다. 여당 의원들이 육탄전을 벌이며 저지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망치를 들고 강제로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예상한대로, 사무실 한 켠에서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증명할 수 있는 문건이 대량 발견되었다.[3] 이로써, 국정원의 “국내 정치 불개입 주장”이 거짓말이었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숙이 국내 정치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국정원의 개혁작업이 “헛구호에 거쳤다”는 사실이 웅변으로 입증된 셈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애꿎은 국정원 직원들만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당황한 이종찬 원장이 마치 국가에 큰 변란이 터진 것인 것처럼, 새해 벽두부터 전 직원에게 비상소집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신정 공휴일에 전체 비상이 걸린 것은 국정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국정원 내에는 초유의 비상사태(?)로 인해 곳곳에서 웃지 못할 촌극이 연출되었다. 멀리 동해까지 새해맞이 일출을 보러 갔던 동료들은, 오후 늦게 허급지급 귀사했지만, 지각으로 인한 징계를 피하지는 못했다.
이 참에 이종찬 원장에 대해 한가지만 더 언급했으면 한다. 사실, 이 원장은 정보기관장으로서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내가 겪은 국정원장 가운데 그만큼 정보기관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원장은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정보기관이라는 공조직을 끌어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자기 집안이 독립운동의 명문가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국정원의 전 해외 조직을 동원하여,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하라”는 특별수집지시를 내렸다. 그 후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자료를 원 내에 전시하기도 하고, 관련 책자도 만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출판된 책자를 살펴보니, 그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할 때, 마중 나갔던 이종찬 어린이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었다. 너무나 뻔히 속이 들여다 보이는 처사였다.
한편, 그는 마치 신채호 선생이 의열단을 조직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했다. 신채호 선생이 한 때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독립선언』을 집필하는 등 일시적으로 의열단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4] 의열단을 창설하고 지휘한 사람은 엄연히 약산 김원봉 선생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을 이렇게 왜곡하는 것은 범죄이다.[5]
이처럼, 이 원장은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많이 벌였다. 내가 이미 글에서 밝힌 것처럼, 이 원장이 추진한 일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것이, 노벨상 수상 공작이었다.[6] 나는 이 원장이 무리하게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을 벌인 이유가, 김대중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짐작한다. 지나고 나서 보면, 결국 김칫국을 마신 형국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지난 1999년 5월, “이종찬 원장은 일요일 오후 골프 치다가 경질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에 청와대에 들어가 국정원의 부서장 인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결제를 받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 인사안에는, “이 원장의 사람이 많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원장이 자기 사람을 심어 국정원을 장악하려 하자, 동교동 측에서는 이 원장이 차기를 노린다고 판단하고, 먼저 선수를 쳤던 것이다. 이 원장의 전격적인 경질에는 “신건 차장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당시 이 원장과 신 차장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당시 신건 차장은 법무부 장관 자리를 내심 탐내고 있었는데 김태정 검찰총장이 강력한 경쟁자였다. 신건 차장으로서는 김 총장과 사이가 좋은 이원장이 “중간에서 초를 치고 있다”고 믿을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옷로비 사건으로 조기 낙마하긴 했지만, 그 후 결국 김태정 총장이 신건 차장을 물리치고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신건 차장은 동교동 쪽에 줄을 대고 있었다. 동교동에서도『신실세 트로이카』를 줄곧 곱지 않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정치과 친구에게 듣기로는, “신 차장은 전주고 출신 직원 한 명을 정치과 배치시켜, 은밀히 이종찬 원장에 대한 정보만을 전담하도록 시켰다”고 한다.[7]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라는 부훈을 새로 제정하고 부훈석 제막식을 했다고 한다. 이는, 성경구절에서 따온CIA의,“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Truth will set you free)”라는 부훈과, CIA 벽에 걸려 있다는“익명에의 정열”(Passion for Anonymity)라는 모토를 적당히 짜집기한 느낌이 든다.
이 방은 원래 김영삼 정권 초 안기부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법제화되면서 국정원의 대 국회 연락관이 사용되던 방이었다. 당시 초대 국회연락관으로 나간 사람은 김은성 씨였다.
당시 발견된 문건 중에서 국회 담당이었던 안철Ο 수집관이 작성한 것이 많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사직했는데, 그 후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청와대의 모 국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은 조선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읽어 볼만한 명문장이다. 그 글은 묘하게 사람의 피를 끓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 후 김원봉은 좌익으로 돌아선 후 광복군을 창설했다. 해방 후에는 북으로 올라가 국방상이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1부 양심선언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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