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말, 새로 부임한 천용택 원장은 이종찬 원장이 추진하던 사업을 모두 중단시켰다. 두 사람은 육사 동기였는데, 둘 사이에 무슨 악연이 그리 깊었던지, 천 원장은 감정적으로 이 원장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원장이 추진하던 노벨상 공작도 전면 중단시켰다.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 등장한 많은 벼락 출세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개념 없고 저열한 인물이었다. 지시 사항을 들으면 그 사람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식한 원장일수록 보고서에 트집을 많이 잡는다. 자기 자신의 무식함은 탓하지 않고 글쓴 사람의 유식함을 비난한다.
천 원장은, “보고서에 한자를 줄여라”거나, “경제보고서는 쉬운 용어를 쓰라”거나, “모든 보고서는 16줄 이내로 줄여라”라는 등의 엉터리 같은 지시를 하곤 했다. 그의 말을 풀이하자면, “내가 가방끈이 짧아 그러니께로, 알아서 내 수준에 맞춰 쉽게 쓰라잉~”이라는 말이었다.
천 원장 재직 중에 해외 분석 부서 직원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이 무식한 원장은 해외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도통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에게 해외 분석관들은 그저, “밥이나 축내는 머저리들”이었을 뿐이었다.
대신 그는 국내 부서는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정치인 출신답게 정보를 정치에 악용하려고 했다. 국내 첩보 수집을 독려하면서 수집관의 활동비를 무한정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감청 부서에게는 도청 활동을 강화하도록 강력히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국정원이 또다시 국내 정치판으로 깊숙이 발을 담그게 되었다. 또다시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천 원장의 부임 직후에 벌어진 남촌사건은 좀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정권 교체 후 국정원의 해이해진 기강과 전라도 출신들의 전횡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렇다. 양재역 부근에 남촌이라는 고깃집이 있었는데, 이 고깃집 마담은 안기부가 이문동에 있을 때에 그 부근에서 음식점을 하던 여자였다.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하자 그녀도 따라서 강남으로 이사해 와서 문제의 남촌을 개업했다.
그런데, 국정원 간부들이 저녁마다 그 고깃집에 몰려가 죽치는 일이 많았다. 그 중에서 대북전략국 간부들은 거기서 고돌이 판을 벌이는 일이 많았는데, 서영교 단장 같은 경우는 그 집에서 아예 보고서까지 손보기도 한 모양이었다. 이들을 통해 “황 선생의 전화번호가 누출되어 북쪽으로부터 황 선생에게 한 밤중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괴소문까지 생겼다.
국정원 간부들이 “이 마담 마타하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말도 돌았다. 이건모 감찰실장이 조사를 지시했다. 감찰실이 나서서 조사를 해보니 의외로 연루된 물고기가 많았다. 이 중에는 정권이 바뀌고 난 후, 한창 잘 나가던 목포상고 출신 간부 4명도 포함되었다.
내가 앞에서 “국정원 최고의 한량”으로 소개한 최 모 감사관과, 정 모 감찰과장도 그들 사인방의 일원이었다. 이들 목상 사인방은 남촌에서 놀면서, “마담 마타하리와 구멍 동서로서 우의(?)를 다졌다”는 말까지 돌았다. 특히 최 감사관은 감찰실의 조사에 격분하여, 이건모 감찰실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죽고 싶냐”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건모 감찰실장은 이들을 조사한 파일을 들고 신임 천용택 원장에게 올라갔다. 천 원장은 즉각 최 감사관을 파면 조치하고, 김 감찰과장을 보직 해임하는 등의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해서 목포상고 사인방은 한 순간에 묵사발이 났다. 서 단장은 보임 해제되어 총무국 대기 발령을 받았다.
천 원장 시절 벌어진 소위 『언론대책문건』 사건도 대표적인 황당 시츄에이션이었다. 이번에도 정형근 의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99년 10월, 정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비방안”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공개했다. 그는, “현 정권이 국세청 등 관계기관을 동원하여 언론사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곧 이어, “정 의원이 문제의 대책 문건을 모 방송국 기자로부터 입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어서, “모 언론사의 문 모 기자가 이 문건을 작성하여 이종찬 전 원장에게 건넸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정국이 급속히 냉각되면서, 국정원은 또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렸다.
국정원이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이종찬 전 원장의 집에 들이닥쳐 불법 반출된 문서를 회수해 오는 소동을 벌였다. “천용택 원장이 전임 이종찬 원장의 국제 전화를 도청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국정원으로서는 이래 저래 개망신이었다.
문제를 제기한 한나라당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은 자체적으로 진상을 조사한답시고 문 기자를 찾아 조사단을 북경 현지에까지 파견했지만, 그의 거주지조차 찾지 못하고 헛발질만 해댔다. 결국, 이 사건은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만 조장하고 승자 없이 막을 내렸다.
김한정이 99년 12월 청와대에 들어가고 난 직후, 천 원장이 잘렸다. 그의 갑작스런 경질 이유는 코미디적이다. 천용택은 99년 12월 일부 법조담당 사회부 기자들을 청사로 초청했다. 자신의 부인이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언론에 자꾸 거론되자 기자들을 무마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 원장은 이 자리에서 여러 가지 민감한 정보를 흘렸다. 정형근 씨를 도청한 문제라든가, 홍석현 씨의 뇌물 정보 등 국내 현안은 물론이고, 민감한 대북정보까지 흘려주었다. 그는 평소 직원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보안을 강조했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런 보안의식이 없었던 셈이다.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천 원장의 정보는 미림팀의 도청 테이프에 나온 내용들이었다.
며칠 후, 그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례보고를 들어간 자리에서 보안누설에 대해 주의를 받고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 날에 터졌다. 남궁진 정무수석이 기자들의 취재수첩을 회수하여 발언내용을 확인했더니, 천 원장이 대통령을 “김대중이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대통령을 거명할 때, “대통령님”이라던가, “선생님”, 또는 최소한 “DJ”라고 불러야 했다. “김대중이가...”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불경한 언사였다. 그 즉시 해임이었다.[1] 그 후 그는 재기하기 위해 "이희호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졌다."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내일신문 2000년 1월 6일 자 천용택 경질 특종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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