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즈음 나의 퇴사 결심을 확고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는 출신 지역 때문에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불쾌한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권진호 차장이 부임해 왔을 때, 나는 그의 보좌관으로 내정되어 그에게 부임인사까지 마쳤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인사가 없던 일로 되었다. 아마 나의 출신 지역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진로문제에 대해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었는데, ‘퇴사할 때 하더라도, 남북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0년 7월경 대외협력보좌관실이 해체되자전략국으로 전출해 주기를 행정과에다 요청했다.
나의 전출 희망을 접한 행정과는 황당해 했다. 국정원 내에서 해외공작국은 선망의 부서로 전입해 오고 싶어 안달하는 직원이 줄을 섰는데, 제 발로 걸어 나가겠다고 하니 의아했던 모양이다. 김내О 행정과장은, “이 참에 타 부서 전출을 희망하는 직원이 더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10여명의 직원이, ‘전출을 희망한다’고 손을 들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행정과가 당황해 했다. 부랴부랴 달래 몇 명은 주저 앉혔지만, 그 중 여섯 명은 끝까지 “나가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한병О 행정계장이 전출을 희망하는 직원을 개별적으로 행정과로 불렀다. 내가 행정과에 불려 들어가니 한 계장은 나에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종이를 읽어보니 일종의 서약서 같은 것이었다. 그 서약서에는, “해외공작국으로 다시 전입오지 않겠다는 것과, 타 국에 가서는 파견관 신청 등 해외공작국의 인사에 부담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을 서약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이미 서명을 한 상태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전출하는 직원들에게 창피를 주려는 의도임을 눈치챘다. 나는 이들이, ‘국정원이라는 조직을 무슨 양아치 조직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공조직을 지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에 화가 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서명할 수 없습니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행정계장은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양보하지 않고 버티자, 급기야 그는,“야, 이 XX야, 니가 그리 잘 났냐?”며 악다구니를 쓰며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나는,“내가 잘난 건 없지만, 부당한 요구에는 응할 수 없다”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공작국으로 다시 오고 않고의 문제는, 내가 후에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누구에게 서약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파견관을 신청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다 되려 망신을 당한 셈이 되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행정과 직원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정과장이 소동을 알아 채고 과장실에서 나왔다. 나도 그 길로 행정과에서 걸어 나왔다.
그날 오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행정과 김광О 선배는,“김기삼씨, 잘했어! 그런 서약서에 싸인을 왜 해?”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자기가 보기에도 행정과의 처사가 너무 경우에 어긋나 보였던 모양이다. 행정과에서는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는 눈치였다. 감찰실에 알려져 조사라도 받게 되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행정과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행정계장이 전출 직원들과 점심을 같이 하길 원한다”고 했다. 나는 쓴 웃음이 났다. 해외공작국에서 전출해 나가면서 점심까지 얻어 먹는 첫 케이스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이 사람들과 더 이상 상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퇴사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그러나, 우선은 대북전략국에 가서 대북 문제를 어떻게 하는지 좀 살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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