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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8.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

41. 남북교류 현장의 이모저모

각설하고, 전략국에 전입하자마자 나는 제 1차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준비하는 상황실에 배속되었다. 상황실장은 김만복 과장이 겸했다. 이 행사는 남북한이 어떻게 교류하는 지를 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황실에서의 행사준비는 전략1과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부서에서 행사 진행요원으로 차출되어 파견 나온 수십 명의 직원들도 같이 근무했다. 수송, 통신, 안전 등 행사지원 부서에서 파견나온 직원도 있었고, 홍보를 담당하기 위해 국내 부서에서 언론을 담당하러 나온 사람도 있었다. 

행사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독일에 주재하는 파견관으로부터, “류미영 천도교청우당 당수가 북한의 인솔단장으로 올 예정이다라는 첩보가 들어 왔다.[1]독일에 있는 류미영의 아들이 북한의 정보기관 고위 간부인 김경남 참사로부터 직접들은 말이라고 했다.

상황실에서는 이 첩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느라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이 첩보에 얼마만큼의 신빙성을 부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상황실에서는, “북측이 역사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잿가루를 뿌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첩보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위로 올리는 보고서에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며칠 후, 북측은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실제로 류미영을 인솔단장으로 내려 보냈다. 정보 판단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했다. 김정일 집단을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집단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비이성과 광기를 간과한 때문이었다.

나는 국정원에서 근무하면서, “적어도 북한을 다룰 때는 건전한 상식과 이성은 잠시 제쳐 놓은 것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종종 있었다. 김정일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추론이 무용지물이 될 때가 허다했다. 이 사건도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행사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해외공작국의 동기인 차병О로부터 전화가 왔다.[2] 그는 김만복 과장을 찾다가 내 목소리를 알아 채고는, “형이 전화를 받으니 잘됐네면서, “분데빅 노르웨이 총리 일행의 방한이 있는데, 협조를 좀 잘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관련 보고서를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한 후 김만복 과장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후에 들으니, “동구과 북구팀의 박노О 팀장이 극비리에 분데빅 총리 일행을 행사장으로 안내했다고 한다. 분데빅 총리는 수백 명이 엉겨서 울고 불고 하는상봉현장을 직접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를 예방한 후 노르웨이로 돌아 갔다. 그의 방한이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행사가 시작된 후 워커힐호텔로 상황실을 옮겼다. 국정원과 통일부 직원들이 합동으로 행사 지휘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통일부가 행사를 주관했지만, 실제로는 국정원에서 모든 행사를 관장했다. 통일부는 예산을 지원하고 연설문을 작성하는 등 행사의 제반 뒷치닥거리를 했을 뿐, 그들은 국정원의 허락 없이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상황실 한 켠에서 서영О 실장이 통일부의 홍양호 국장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는 소리가 들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 보니, “통일부에서 국정원과 상의없이 만찬장 좌석배치를 마음대로 바꿨다고 야단치고 있는 중이었다. 듣고 있던 통일부 직원들은 자신들의 상관이 타 부처의 간부에게 깨지고 있는 게 창피하고 민망했던지, “XX놈들, 지들끼리 나가서 싸울 일이지, 왜 여기서 지랄들이야라며 투덜거렸다.

행사 진행요원들로부터 북측 인사들의 동태에 관한 보고가 상황실로 속속 들어 왔다. 상황실에서는 상황보고로 정리하여 원장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북쪽 가족들은 단체로 맞춤옷을 입고 왔다. 그들은 철저하게 단체로 움직였다. 그러다, 기자들을 만나면 오버 액션을 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배려로…” 어쩌고 떠들다가, 카메라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어떤 이는 카메라 앞에서 김정일화를 내보이며 할리우드 액션을 연출해 댔다.

그들은 사전에 무슨 교육을 그리 철저히 받았는지 모두 한결같이 똑같은 소리만 했다. 더 이상 비난거리를 찾지 못하면, “남조선 처녀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깨를 다 드러내 놓고 다닌다라든가, “남조선 젊은이들은 왜 줏대없이 머리를 노랑색으로 물들이나?”는 등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물론, 그들도 남쪽이 훨씬 잘 산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발달한 서울 풍경에 내심 놀라는 눈치들이었다. 그들은 남쪽 가족들이 몰래 주머니에 달러를 집어넣어 주길 가장 원했다. 하루 행사가 끝나면, 그들은 밤늦게 다시 모여 저희들끼리 소위 총화라는 걸 했다. ‘참 피곤하게 사는 인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끝난 후, 나는 교류협력 1과로 인사조치 되었다. 전략국의 인력과 업무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 교류협력1과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을 통괄하는 과였다. 남북의 모든 교류 사업은 실질적으로 국정원의 교류협력1과에서 관장하였다. 현대의 대북사업도 교류협력1과 소관이었다.

내가 교류협력1과에 가기 전에는 서훈 씨가 과장이었다. 그는, “일 잘하고 인간성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윗사람도 좋아하고 아랫사람도 잘 따랐으며, 동료들도 신임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정규과정 17기로 입사하여 국내 부서에서 일했다고 한다. 서동권 부장의 수행 비서로도 일한 적도 있고, 경제과에서 수집관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대북 문제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은, 북한 신포에 있는 대북 경수로 사업단에 국정원의 대표로 파견되고부터였다. 그는 3년간의 경수로 사업단 대표를 마치고 돌아온 후, 친정인 국내 부서에 돌아가지 않고 전략국에 남았다. 서 과장이 경수로 현장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외교부에서는 이현주 참사라는 분이 대표로 나가 있었다고 한다.

서 과장이 조용히 일하는 스타일인데 비해, 이 참사는 요란스럽게 일했던가보다. 이 참사가 하도 설쳐댔기 때문에, “북한 얘들은 이 참사를 안기부 요원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이현주 참사는 99년경, 경수로 사업장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려 했다가, 국정원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나는 전략1과 캐비넷에 보관되어 있던 이현주 참사의 원고를 읽어 보았다. 책으로 출판하기 전 초고 형태의 원고였는데, 그의 북한 견문기는 대단히 잘 쓰여진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한국 사람으로서 북한에 대한 묘사를 그렇게 정밀하게 잘한 글을 보지 못했다.

서 과장은 김보현 차장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대북협상 때마다 김보현 차장을 수행했다. 서 과장의 북측 파트너는 권호웅(권민) 참사였다. -권 라인은 이후 오랫동안 남북관계의 접촉 창구가 되었다. 서 과장은 남북정상회담 후, 초대 회담 조정관으로 승진했다. 동기들이 계장 자리에 있을 때 그는 단장으로 승진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참여정권에서 NSC 내 정보관리실장을 역임한 후 대북전략국장이 되었다가 3차장으로 승진했다. 

      내가 2000 9월 초 교류협력1과에 전입하니 김해О이라는 분이 새로 과장으로 부임해 와 있었다. 그는 행시 출신의 간부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전라도 정권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정권 교체 후 국정원의 조직개편이라는 중책을 맡았다가 격무로 인해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그 후 정보학교로 잠시 쉬러(?) 갔다가 전략국의 교류협력1과로 실무 복귀한 참이었다.

김 과장은 내가 국정원에서 겪어 본 간부 가운데 드물게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도 성치 않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언제나 솔선수범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교류협력1과의 1팀에 배속되었다. 팀장은 박광○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소위 풍선전문가였다. 심리전국에서 평생 북한에 심리전 물자를 날려 보내던 사람이었다. 풍속과 풍향이 얼마일 경우, 얼마 무게의 풍선을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날려 보내면 언제 북한의 어느 지방에 어떻게 떨어지는지 등의 문제에는 전문가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전문성은 햇볕정책이라는 유탄에 맞아 처참하게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남북관계나 교류협력 분야에는 그야말로 문외한이었다. 간단한 보고서를 기획할 만한 능력도 없어 보였고, 사소한 문제를 판단할 소신도 없어 보였다. 그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 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아랫사람으로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나는 교류협력1과에서 제1차 남북장관급경제교류회의에 행사 진행요원으로 참가했다. 행사장은 평창동에 있는 올림피아호텔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실이 아니라 행사 현장에서 직접 북측 인사들의 동태를 살펴볼 수 있었다. 북쪽의 단장으로는 정운업이라는 사람이 왔다.

이들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방부터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자기들 생각에, 우리가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방을 바꾼다고 못 듣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그런 우스운(?) 요구를 해 왔다.

북측 인사들을 동태를 살펴보니 정보요원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하고 있었다. 가명이겠지만 그의 명찰에는 한 모씨라고 되어 있었다. 만찬장에서 그와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을 때, “당신이나 나나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데 이야기나 좀 하자노골적으로 제안해 봤다.

얘기를 나눠보니, 그는 다방면에 아는 게 많았다. 전문가라고 할 만 했다. 말도 거침 없이 했다. 남북의 경제협력에서 뭐가 문제인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북한의 열악한 물류 시설에 대해서도 솔직히 인정했다. 그와 이야기 해보니 북쪽 사람들이 멍청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체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자기들의 소신대로 살 수 없을 뿐이었다.

정운업은 처음부터 경제교류 따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이었다. 그는 회담 막판까지, “공짜 쌀을 얼마나 많이 뜯어갈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쌀을 뜯어 가지 못하면 마치 큰 문책이나 당할 것처럼 막판까지 떼를 썼다.

전략국에 들어가 남북간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보고 난 후, 나는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정권이 하는 짓을 이제 볼만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애초에 김대중 정권에게 가졌던 기대는 철저히 배반당했다. 더 기대할 것도 없었다.

나는 2000 10월 초, 인사과에 있는 친구 최종○와 퇴사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의 퇴사를 만류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나를 인사계장에게 데리고 갔다. 인사계장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지부든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났다. 친구 О종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너는 인사질서 문란자로 빨간 줄이 올라가 있다. 다시는 부서 옮길 생각을 하지 마라고 농담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차례 옮겨 다닌 건 사실이었다. 교육기간을 제외하고 5년여의 짧은 근무기간 중에 무려 다섯개 부서를 옮겨 다녔다. 그것도 원장 비서실과 1, 2, 3차장 산하를 두루 거쳤으니, 나의 이력서는 분명 이례적인 것임에 틀림없다.[5] 내가 인사질서 문란자로 낙인찍혔다는 말은 무리가 아니었다. 인사계장은 나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6]


류미영은 최덕신의 아내이다. 최덕신은 중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부 장관을 지낸 인사인데, 지난 70년대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6년 아내를 대동하고 북한으로 망명해서 거기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애국열사능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차 직원은 해외공작국 동구과 북구팀 소속으로, 노벨상 공작의 담당 실무 직원이었다.

내가 노벨상 공작 글에서 밝힌 대로, 분데빅 총리의 비밀 상봉장 방문은, 김한정이 노벨상을 수상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벤트였다.

이현주 참사는 후에, “촛불과 횃불이라는 제목으로 그 책을 출판했다.

국정원 내에서 같은 차장 산하 부서로 옮기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하물며 다른 차장 산하로 옮기는 것은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안 된다내가 대형 사고(?)를 쳤으니 아마 요즘은 부서를 옮기는 것이 몹시 까다로워 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정원은 나의 이러한 근무 경력을 이유로 나를 업무부적응자 내지는 정신불안자로 몰았다나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하지만나의 근무경력은 나의 성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