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여름, 나는 임동원을 추적하는 일이 나의 혼자 힘으로는 턱 없이 벅찬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았다. 우선 생각나는 사람이 고향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었다. 그를 찾아가 임동원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김용갑 의원은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그의 부인도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힘없이 돌아 섰다.
미국에서 9/11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동아일보가 김형Ο 경제단장의 뇌물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검찰이 이용호 게이트 수사에서 사채업자인 이경자로부터 김형Ο 단장이 5,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수사하고서도 외압으로 사건을 덮었다고 보도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드디어 국정원에도 9/11가 터졌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회사 내에 있을 때부터 김형Ο 사건의 윤곽에 대해서는 친구들에게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다.
2001년 3월말, 이건모 감찰실장은 새로 부임한 신건 원장에게 정성Ο과 김형Ο의 비리파일을 들고 들어가 보고했다. 브리핑을 받은 신 원장은 그 즉시 정성Ο 경제과장과 김형Ο 경제단장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성Ο의 강력한 반발과 김은성 차장의 비호로 인해 실패하였다. 오히려 이건모 감찰실장이 되치기를 당해 광주지부장으로 좌천되었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신건 원장의 반격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었다. 이어서 11월 초에는 한국일보가 정성Ο 폭행사건을 특종 보도했다.[3] 이로써 진승현 게이트가 재점화되었다. 타이밍이나 정황으로 보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아마 신건 원장 측에서 여론전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김은성 차장과 정성Ο 과장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성Ο 씨는 구속되었다. 나도 더 이상 숨어서 활동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을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 동안 망설이던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좀 만나 뵐 수 있습니까?”고 묻었다. 그는 “기자가 못 만날 사람이 어디 있는가?”며 순순히 응해 주었다. 나는 조 편집장을 세 차례 만나 해외, 대북, 국내 문제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던 주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공작의 개요와 임동원의 간첩혐의, 그리고 정성Ο의 진승현 게이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조 편집장에게 보강 취재하여 기사화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나는 2001년 10월 중순 즈음에 내부 인사로부터, “조갑제 편집장이 청와대 김한정에게 전화하여 노벨상 공작에 대해 취재 확인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직원은 또한, “김한정과 조준오, 그리고 박노Ο 팀장이 노벨상 관련 자료를 파기하면서, 정보누설자를 색출하느라 아주 난리가 났다”라고 했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2000년 10월, 한나라당 유흥수 의원이 국회에서 분데빅 노르웨이 전 총리의 극비 방한사실에 대해 질문하여 크게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분데빅 전 총리의 방한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는데, 국회에서 그런 일이 터진 것이다. 분데빅 방한 건은 사실 내 입에서 나간 말이 돌고 돌아 정형근 의원의 귀에까지 들어 간 것 같았다. 이제 의심의 눈길이 나에게 쏠릴 게 뻔했다. 나는 우선 김한정의 의심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급히 “뉴욕주 변호사 시험을 보러 간다”고 소문을 내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나는 2001년 11월 초, 혼자 미국 행 비행기를 탔다. 갑자기 미국으로 가려니 아는 데도 마땅찮고 해서 내가 연수하던 지역인 펜실바니아 해리스버그로 갔다. 거기서 몇 개월 동안 머물면서 뉴욕주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다. 2002년 2월 말에 첫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엣세이(논술) 부분에 대한 준비 부족이 원인이었다. 뉴욕주 변호사 시험은 이듬해에 재도전하여 합격하였다.
나는 2002년 3월, 잠시 귀국하여 전셋집을 정리하고 다시 가족을 동반하여 미국으로 출국했다. 귀국 기간 동안에 조갑제 편집장에게서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미 의회연구소의 닉쉬 연구원이 쓴 연례보고서를 읽어 보았느냐?”고 물으면서, “그 보고서에 김대중의 대북 비밀 송금에 관한 내용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때 그에게 실망하고 있던 터라, “읽어보지 않았다”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후 조 편집장을 미국에서 두어 차례 더 만났지만 더 이상의 생산적인 논의는 없었다.
월간조선은 2002년 5월 호에서 닉쉬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번역하여 실었다.[4] 그 후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이 기사의 내용을 심층 추적했다. 엄 의원은 2002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를 증인석에 세우고,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불법으로 대출해 준 경위를 캐물었다. 이로써, 대북 비밀 송금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정권은, “터무니 없는 음해”라면서 극력 부인으로 일관했다. 박지원 비서실장은 국회에서도 “북한에 단 돈 1달러도 보낸 적이 없다”며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밀었다.[5] 참으로 후안무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곧 드러날 일도 일단 거짓말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2002년 대선 정국을 통해, 배부른 돼지들 같은 한나라당은 이 같은 절호의 호재를 가지고도 김대중 정권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동아일보 2001.09.18. 자 “국정원 간부 작년 거액수수혐의 검찰소환조사 않고 덮었다” 제하 기사 참조.
한국일보 2003.08.19. 자 “신 원장 – 김 차장 파워게임” 제하 기사 참조.
한국일보 2001.11.13. 자 “국정원 차장, 진승현 로비창구 김재환씨 폭행” 제하 기사 참조.
월간조선 2002년 5월 호 “래리 닉쉬 작성 미 의회조사국의 보고서와 금강산 관광” 제하 기사 참조.
조선일보 20002.10.05. “운영위 대북지원설 공방” 제하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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