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오기 하루 전날, 나는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황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퇴사하고 나면 다시는 만나 뵐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략1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황 선생님 담당관인 유덕Ο 선배에게 특별히 청을 넣었다. 나는 황 선생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친분은 없었으나, 2000년 1월에서 6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에 개최되었던 황 선생님의 인간중심철학 세미나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곶감 한 접을 사 들고 갔다. 황 선생님이 곶감을 좋아한다는 것은 황 선생 관리팀에 있던 동기 Ο일건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전 해 추석 때에도 찾아가 안부를 묻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길래, 곶감을 한 접 사서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황 선생님은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이란 자신의 책에 자필 싸인을 해서 선물로 보내왔다.
황 선생님의 처소는 수사국 건물 내에 있었다. 이문열 작가는 언젠가 황 선생을 가리켜, “조롱 속의 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수사국 건물의 계단을 오르면서, “쪽방에 갇힌 대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시 황 선생님이 지구상에 숨쉬고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성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황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중심주의자로 개종했다”고 농담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황 선생은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북한을 조금만 더 조이면 곧 붕괴할 것으로 판단하고 넘어 왔는데,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며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노를 표시했다. 또한 그는, “내가 정세를 오판하여 북에 있는 가족들을 희생시켰다”며 괴로워했다. 황 선생님은 중요한 대목을 얘기할 때는 필담으로 대신 하기도 했다. 밖에서 다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황 선생에게, “너무 심려 마십시오. 설마 대한민국이 김정일에게 당하기야 하겠습니까?”며 안심시켜 드리려 했다. 그에게는 나의 이런 실없는 언급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듯 했다. 황 선생은 허탈한 눈빛을 지었다. 그의 처지가 그렇게 딱해 보일 수 없었다. 나는 헤어지면서,‘황 선생이 갇힌 몸이 되어 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대신 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나는 전략1과에 근무할 때, 황 선생님 파일을 볼 기회가 있었다. 황 선생님 담당관이었던 유덕Ο 선배가 옆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파일 속에는 황 선생님의 외부 인사 접견 기록도 있었다. 황 선생은 외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자살하고 싶다”고 토로하곤 했다. 그는 갇힌 몸이 되어, 남쪽으로 망명한 뜻은 고사하고,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홍 모 관리팀장이, “김 선생, 오늘 이 자리에서 하신 말씀은 절대 밖에 나가서 하시면 안됩니다”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는 나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황 선생의 모든 언동이 철저히 감시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감시할 줄은 몰랐다.
사실, 황 선생은 1999년 4월 말부터 유폐생활을 시작했다. 황 선생이 그렇게 된 것은 나의 대외협력보좌관실 업무와 연관이 있었다. 전말은 대충 이렇다. 산께이신문의 구로다 기자가 황 선생과의 면담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99년 4월 중순, 김영Ο 박사는 황 선생 대신 김덕홍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김덕홍 선생은 인터뷰에서, “황 선생이 북한의 전병호 군수비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다섯 개나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께이는 김덕홍 선생의 북한의 핵보유 언급을 크게 보도했고, 국내 언론은 다시 산께이를 보도를 인용해 보도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당연히 큰 파장이 일어났다. 햇볕정책에 하등 좋을 일이 없는 언급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은 황 선생의 회부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나종일 차장이 황 선생을 불러 직접 이와 같은 조치를 전달했다.
외부 강연이 중단되자, 황 선생은 탈북자동지회가 발행하는 『민족통일』이라는 조그만 월간지를 통해 가끔씩 자신의 생각을 외부에 전달하곤 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직후, 임동원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은 이 잡지마저도 폐간시키고 말았다. 황 선생이 그 잡지에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황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3년 11월 워싱턴에서였다. 그의 방미 여행 중에 나는 가까이서 황 선생의 방미를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같이 온 일행과는 호텔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나는 그 때 워싱턴에서 황 선생의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만찬장까지 들어와 감시하고 있었다.[3] 그 때에도 국정원은 밀착경호를 핑계로 황 선생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황 선생의 입을 막으려고만 했다. 황 선생이 무슨 발언을 하는지 극도로 신경을 썼다. 황 선생이 상원 의원실을 방문했을 때에도 무슨 얘기를 하는 지 들으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북한의 핵무기 5기 보유설은 이미 지난 1994년 탈북자 강명도가 기자회견에서 예정에 없이 발설하여 큰 말썽이 난 적이 있었다.
탈북자 동지회 출간, 민족통일 2000년 7월 호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제하 기사 참조. 동 기사는 월간조선사 출판, 황장엽 비록 공개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제하 책자 184 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음.
황 선생의 방미 행사에 대해서는 월간조선 2003년 12월 호 김미영 기자가 쓴, “황장엽 방미의 뒤안 길 – 공식 수행원의 수기”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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