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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0. 국정원을 퇴사하고서

50. “15억 달러랍니다”

나는 그때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피신한 후 커뮤니티칼리지에 등록하고, 틈틈이 미국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김대중 측이 김대업을 앞세워 더러운 공작을 꾸미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도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이라도 한나라당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광복절인 2002 8 15, 나는 한나라당의 이병기 특보에게 인편으로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임동원의 간첩혐의에 대해 은밀히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윤여준 특보와 접촉해볼까 생각을 했으나, 이병기 특보가 더 적합한 사람 같아 보였다. 국정원 차장을 지낸 사람이니 노벨상 공작 등에 대해 이해가 더 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회창 후보 측이 김대중 측의 비열한 공작을 저지하는 데 나의 정보를 현명하게 사용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그 즈음 간간이, 워싱턴에 살고 있다는 윤홍준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20029월경,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의 주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직접 찾아갔다. 그는 신변 안전을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고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나를 무척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를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지나고 만남이 여러 번 계속되면서 그도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로 가슴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당시 한참 이슈가 되고 있던 대북송금에 대해 얘기가 나왔을 때, 그는 지나가는 말로 “15억 달러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언제인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난 2000년 초 날씨가 제법 쌀쌀한 날 동경에서 김정남을 만났는데, 그 때 김정남과 그의 수행원인 황 대장이라는 친구로부터 남북간의 뒷거래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패스포트를 확인해 보았다. 그의 여권에는 20002월과 4월초에 일본에 갔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윤홍준의 설명에 의하면, “남과 북은 1999 12월 말, 국정원의 파우치(외교행낭)를 이용하여 남측이 북측에 유로화로 미화 15억불을 송금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당초에 윤홍준은 김정남 일행으로부터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는데, “지금에야 그것이 남북정상회담의 뒷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윤홍준은 당시의 김정남의 이야기하던 자세와 감정상태까지 기억해내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었지만, ‘나는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윤홍준의 얘기를 듣고, 나는 내가 아는 김한정의 행적과 윤홍준이 말해 준 김정남의 이야기를 서로 부합해 보았다.

지난 99 12월 말이면, 김한정이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부임하던 시기였다. 김한정은 99 7, 김대중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선사했고, 8월에서 12월까지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나는 그 때아무런 보직 없이 자유로운 몸이었던 김한정이, 밀사로 활동하기에 제일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북쪽에서 김정남이 나섰다면 남쪽에서도 김정남과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이 나섰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한정이 63년 생이니, 70년생인 김정남과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국정원의 파우치(외교행낭)로 약속한 돈을 보내기로 했다는 부분도김한정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아이디어라고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여권에서는 국정원의 파우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국정원의 파우치에 대해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파우치를 직접 이용해 보지 않고는 도저히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김한정과 같이 근무하면서, 그가 파우치를 이용하여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물자를 보내고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더욱이, 유로화로 돈을 보내기로 약속한 점이 미심쩍었다. 왜 하필이면 유로화였을까? 달러화로 보내면 CIA의 추적에 걸릴 게 뻔하니, 그렇게 한 것은 이해가 되었다. 김한정이 90년대 중반 미국 럿거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했으니, 당연히 유럽연합과 유로화에 대해 상식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김한정이 대학에서 그래도 명색이 국제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당시 북한이 유로화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지대한 관심을 표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런데, 무엇보다도남쪽의 밀사는 북쪽이 믿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한정이 대학 다닐 때 운동권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경력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공개자료를 좀 더 면밀히 살펴 보았다. 나는 보안사 사찰대상 서울대생 명단에서 김한정이라는 이름을 확인하였다.[1]

        또한, 김한정이 간첩활동을 한 이근희를 이상수 의원의 비서관으로 추천했다는 기사도 찾아내었다. 92 9월 대통령 선거 바로 직전 발표된 김대중 비서관 간첩사건의 주역인 이근희 국방비서와 김한정이 밀접한 관계인 것이 확인된 것이었다. 김한정이 이근희를 김대중 캠프로 끌어 들여 왔을 게 틀림없었다. 김한정과 이근희, 그리고 간첩활동을 매개한 황인욱은 대학 다닐 때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김대중의 밀사로 김한정이 활동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2]


한겨레신문 1990.10.9. 보안사 사찰 서울대생 387명 명단제하 기사 참조.

조선일보 1992.10.30 4면 국회 대정부 질문 지상 중계 기사 중에서.

이정우 법무부장관=“국방기밀문서의 대북 유출혐의로 구속된 김대중 민주당 대표의 전 비서관 이근희는 86년 5월3일 이적단체인 구국학생연맹에 가입, 이적표현물 수종을 소지하고 있다가 87년 4월20일 체포돼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91년 9월 중순쯤 모 의원의 6급 비서 김한정이 이상수 전 의원의 입법보조원으로 이근희를 적극 추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