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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1 펜실바니아의 어느 시골에서

57. 정치적 망명을 선택하다 지난 2003년 2월, 노벨상 공작과 대북 비밀송금에 대한 글을 올리고 난 후, 나는 우리 정부로부터 국정원직원법상 직무상 취득한 비밀 누설금지 위반과 일부 직원으로부터 형법상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나는 고발장을 직접 받지는 못했지만, 서울지방검찰청으로부터 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언론도 나에 대한 고발 사실을 보도했다. 나는 유 모 담당 검사에게 전화하여 나에 대한 고소 사실을 문의했으나 그는 확인해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명백히 명예훼손을 했구먼”이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명예훼손은 주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는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명예훼손은 진실을 밝혔을 경우에도 성립할 수는 있느나 그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경우 성립하지 않는다.[1] 나는 이 일.. 더보기
56. 국정원의 불법도청이 드러나게 된 경위 지난 2005년 여름,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이 세간에 알려져 충격을 줬다. 물론 국정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불법도청을 부인해 왔었다. 급기야 “국정원은 불법 도청을 하지 않는다”는 엽기적인 신문 광고까지 냈다. 애초 대선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국정원의 한 부서인 과학보안국의 조직적인 불법 도청이었다. 그중에서도 휴대전화 도청문제가 쟁점이 됐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이에 대해 2003년도에 상세히 밝힌 적인 있었다. 국정원의 도청이 밝혀지게 된 연유는 이렇다. 2005년 초, MBC의 이상호 기자가 재미 교포인 박인회 씨로부터 도청한 내용을 녹음한 CD자료를 입수했다. 이른바 ‘X파일”이었다. 그 CD의 주요 녹음 내용은 지난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의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 더보기
55. 무기도입 비리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 2003년, 특검이 허무하게 끝나고 그 해 연말이 됐다. 갑자기 청와대에 소속된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무기비리에 대해 수사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 정권에서 정신을 차리고 뭔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가 싶어 한 때나마 약간의 희망과 설렘이 다시 일었다. 참여정부에 참여한 부산 출신 인사들이 뭔가 제대로 하려는가 보다고 기대되었다. 그래서, 이호철 민정 비서관에게 e-메일을 보내, “수사에 협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도 즉각 관심을 표명해 왔다. 몇 차례 e-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국방비리만 근절하면 국방예산 10% 증액이 온다는 마음으로 타협을 하지 않고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건너 가겠다”까지 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후 외교부의 청와대 항명사건을 처.. 더보기
54. 대북송금 특검과 정몽헌 회장의 타살 의혹 다시 대북송금 얘기다. 정권이 바뀌고 3월로 접어들면서, 대선에 패배하여 주눅이 들어 있던 한나라당이 서서히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대북송금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을 발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임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을 승인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특검이란 승부수를 가지고 김대중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전, 현직 대통령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듯 했다. 최근 발간된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는 이 때 노 대통령이 특검을 받아들이게 된 사연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1] 그 책의 설명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송금사실을 인정하면 통치행위론으로 무마하여 넘어갈 수 있었는데, 끝내 송금하실을 몰랐다고 우겼기 때문에 통치행위론을 주장할 근거가 .. 더보기
53. 양심선언의 언저리 노벨상 공작과 대북송금에 대한 나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가자 애국적인 네티즌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표명해 주었다. 대선 패배에 의기소침해 있던 그들에게는, 마치 청량제 같은 정보였을 것이다. 여러 인터넷 신문들이 나의 글을 전제하고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다. 특히 인터넷 독립신문과 사이버뉴스24라는 매체가 열심이었다. 개인 네티즌들이 이 글들을 퍼다 날랐다. 설연휴가 지나자 일간지들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특히,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후속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모 전직 장관급 인사의 – 아마도 이정빈 전 외교장관이라고 짐작되지만 – 언급을 기사화 하면서,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을 기정 사실화하는 보도를 내 보냈다. 역시 앞뒤 안가리고 나가기로는 동아일보를 따를 언론이 없었다. 동아는 또한 동티모.. 더보기
52. 양심선언을 발표하다 2002년 12월 19일, 이변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회창 후보는 노무현 후보에게 석패했다.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보수표 “2인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와 한나라당의 패배는 안일함 때문이었다. 김칫국부터 마신 게 패인이었다. 이회창 후보자 자신은 일찌감치 대세론에 안주하였고, 그의 측근들은 정권 교체 후 차지할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듯이 보였다. 모두가 한여름밤의 꿈에 젖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회창 후보는 5년 전 패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한 이유는 보수진영의 분열과 DJP 연합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김종필 총재와 이인제 후보를 끌어안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2002년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는 보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