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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1 펜실바니아의 어느 시골에서

56. 국정원의 불법도청이 드러나게 된 경위

지난 2005년 여름,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이 세간에 알려져 충격을 줬다. 물론 국정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불법도청을 부인해 왔었다. 급기야 국정원은 불법 도청을 하지 않는다는 엽기적인 신문 광고까지 냈다. 애초 대선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국정원의 한 부서인 과학보안국의 조직적인 불법 도청이었다. 그중에서도 휴대전화 도청문제가 쟁점이 됐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이에 대해 2003년도에 상세히 밝힌 적인 있었다.

국정원의 도청이 밝혀지게 된 연유는 이렇다. 2005년 초, MBC의 이상호 기자가 재미 교포인 박인회 씨로부터 도청한 내용을 녹음한 CD자료를 입수했다. 이른바 ‘X파일이었다. CD의 주요 녹음 내용은 지난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의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여야의 대통령 후보에게 어떻게 선거자금을 제공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후에 밝혀지기로는, 문제의 CD는 지난 98년 미림팀의 공운영 팀장이 박인회에게 넘겨 준 것으로, 박인회는 이 CD를 이용하여 삼성에게 접근하여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었으나 삼성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박인회 씨가 이 CD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난 후에 MBC에 넘긴 것이었다. 이상호 기자는 입수한 정보를 보도하려고 하였으나 MBC 수뇌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CD의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물론 안봐도 아는 문제이지만 청와대의 압력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MBC가 세기의 특종을 확보하고서도 반 년이나 보도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CD에 관한 소문이 기자들 사이에 퍼졌다. 그 해 7월 초, 조선일보의 이진동 기자가 내게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e-메일을 보내왔다. 그는98년 공 서기관이라는 직원이 퇴직하면서 도감청 테잎을 왕창 들고 나갔다가 엄 차장 시절 압수 당한 적이 있었다면서, “공 서기관의 이름과 인적 사항 등 혹시 아는 내용을 얘기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라며 나에게 협조를 구해 왔다.

나는 민감한 문제인지라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대답했다. 고민이 되었다. 과연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 일인지 심각하게 생각했다. 미림팀의 존재가 알려지면 틀림 없이 벌집 쑤시는 꼴이 될 것이었다. 아니면 예전처럼 아무일 없는 것처럼 지나갈런지도 몰랐다. 만약 소동이 벌어지게 되면 국정원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었다. 국정원의 동료들로부터 다시 한 번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걸 각오해야 했다.

그렇다고 마냥 숨길 수 있는 문제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언론에서 CD 제작자의 직급과 이름까지 파악하고 있는 마당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 참에 김대중의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국정원이 진정한 국민의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진실은 언젠가는 들어날 것이고, 모든 것은 진실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후 내가 아는 미림팀의 불법도청 사실을 조선일보에 제보해 주었다. 7 21, 조선일보는 내가 제보한 내용을 특종 보도했다.[1] 그 기사는 취재원을 숨기기 위해 이리저리 여러 출처를 인용했지만 대부분 나의 제보에 기초한 내용이었다. 즉각 커다란 파장이 일었다. 보도에 의하면, “국정원의 일부 관계자들은 세벽 4시에 긴급 호출을 받아 출근했고, 오전 6시에 긴급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는 등 초긴장 상태로 들어갔다고 한다. 삼성도 이학수 부회장 등 구조조종본부 수뇌부들이 연쇄 마라톤 회의를 하며 대책마련에 고심했다고 한다.

다음날 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담당자로부터 전화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이미 내가 조선일보의 취재원이란 사실을 알고 연락해 온 것이었다. 인터뷰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뷰에 응해 내가 아는 사실을 얘기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미림팀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미림팀의 도청뿐만 아니라 지난 정권의 휴대폰 도청 문제까지 다시 거론했다이 방송을 계기가 되어 국정원의 불법 도청 문제가 다시 공론화되었다. 

7월 말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기자들이 공운영 미림팀장을 사냥하듯 찾아 나섰다. 숨어 지내던 공 실장은 이윽고 자술서를 남기고 할복 자해를 기도했다.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유출한 데 대해 자복으로 책임을 지려 했다. 그의 자해는 쇼가 아니라 진정성이 보였다. 나는 미림팀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최초 제보한 사람으로서, 그의 자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날 새벽 나는 급히 도청문제와 국정원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혔다. 당시 발표했던 글을 여기에 다시 싣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림’팀의 불법도청 문제를 제보한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입니다. 최근 일련의 상황 전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저의 입장을 밝힙니다.

1.
공운영 팀장의 자해를 보면서

저는 미림팀의 존재와 활동상황을 최초로 제보한 사람으로서, 오늘 공 팀장께서 자해라는 극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접하고 무거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은 공 팀장이 아니라, 국민들을 속이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조국을 반역한 몇몇 정치 지도자과 그들에게 부역한 무리들입니다.

저는 이번 제보를 통해, 국정원에게 무의미한 4-50년 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4-5년 전의 중대한 일이나 제대로 조사하라고 충언하고 싶었습니다.

한 용기 있는 젊은 기자의 노력으로 특종을 입수하고서도, 돈과 권력에 눌려 압사당한 MBC로 하여금 상황을 타개하도록 유도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제보가 결과적으로 공 팀장님을 극단으로 몰고 간 이유 중의 하나가 된 것 같아 깊은 책임감을 통감합니다. 공 팀장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2.
저에 대한 소환조사 발표에 대하여

국정원직원법에 의하면, 모든 직원은 직무상 지득한 비밀을 누설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제가 언론에 제보한 안기부의 불법도청에 관한 내용은, 제가 “직무상” 지득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미림의 활동에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미림의 활동과는 아무런 직무 관련성이 없습니다.

또한, 제가 제보한 안기부의 불법도청에 관한 내용은, “비밀”이 아닙니다. 미림팀은 국정원의 직제에 없는 사적인 비밀 조직이기 때문에, 미림과 관련한 어떤 내용도 국정원직원법상 보호되어야 할 비밀이 아닙니다.

게다가, 미림의 활동은 프라이버시권 등 국민의 헌법상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불법적인 활동입니다. 국민들의 알권리라는 측면에서도 세상에 공개되어야 마땅한 것이지 보호받아야 할 비밀이 아닙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과거 국정원의 불법행위에 대해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국정원의 불법행위를 밝힌 저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 망정, 소환 조사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3.
저의 퇴직 문제에 대하여

국정원은 저의 퇴직에 대해 “외국 연수 후 의무복무규정 등을 준수하지 않아 직권 면직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제가 퇴직하는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암시한 것은 국정원의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되었고 생각합니다.

저는 1996-1997년간 안기부 내 정보대학원에서 영어 연수를 마치고 난 후, 1997-1998년간 미국 펜실바니아 주립 디킨슨 법과대학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실이 있습니다.

의무복무규정이란, 2년 이상 외국 연수를 갔다 오는 경우 5년간 의무 복무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헌법상의 권리인 직업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것으로, 그 동안 여러 차례 무효 판결이 내려진 규정입니다.

저의 경우, 연수 후 2년 이상 근무했다는 이유로 의무복무규정을 적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퇴직금을 전액 수령하는 등 퇴직 과정에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고, 아무런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습니다.

4.
저의 가족의 망명 신청에 대하여

국정원은 저의 가족의 망명 신청에 대해 “정치적 박해를 당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라고 밝히면서, 저를 인터폴에 수배한 상태라며 저를 마치 범죄인인양 취급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종, 성별, 이념, 종교, 정치적 견해 등으로 인해 박해를 당할 염려가 있을 때 망명이 허락됩니다. 저는 현재 국정원으로부터 기소를 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정치적 견해로 인해 박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현재 미국 정부가 저의 망명신청에 대해 결정을 못하고 곤혹스런 처지에 있는 점을 이해합니다.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걸려 있는 데다 저의 신분이 민감하기 때문에 선뜻 망명을 허락하지 못하는 있다고 봅니다.

국정원이 진정 저를 형사범이라고 판단한다면, 한미형사공조협정에 의해 저를 인도해 줄 것을 미국측에 요청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지난 2년여 동안 저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요청하기만 한다면, 저는 당당히 조사에 응할 뜻이 있습니다.

5.
국정원의 명예훼손에 대하여

지난 2003 1, 제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공작과 반역적인 비밀 대북 뒷거래를 폭로하자, 국정원은 저에 대해 성격이 불안정해 정보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시로 옮겨 다녔으며, 금전을 목적으로 폭로했다고 발표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국정원의 악의적인 발표가 저의 명예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저는 국정원이 발표한 대로 성격 이상자도 아니며, 능력 부족자도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국정원의 명예훼손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5.
일부 언론의 오보에 대하여

최근 일부 언론은, 제가 MBC 이상호 기자에게 X파일을 유출했고, 테이프를 가지고 삼성에게 협박하여 돈을 뜯어 내려한 파렴치범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저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악의적인 내용이 보도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향후에 이러한 무책임한 일부 언론사에 대해서도 법적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해 8월 초, 노무현 대통령이 김승규 원장에게 있는 대로 철저한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김승규 신임원장이 검찰 출신이었기에 국정원이 검찰의 수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고 국정원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이어지면서 국정원은 창사 이래 최악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백 여 명의 국정원 전, 현직 직원들이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나와 가까웠던 분들도 불려갔다는 소식도 들렸다.

몇 달간의 수사로 국정원의 불법도청이 확인되었다. 국정원은 과거를 털어놓고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임동원, 신건 원장과 김은성 차장 등이 구속되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이수일 차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가 발생했다. 김은성 차장의 딸도 가족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록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안타깝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찌하여 책임져야 할 사람은 뻔뻔하게 살아 남고 애꿎은 사람들만 죽어 나가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 2005. 07.21안기부 YS정부 때 비밀조직운영 정, , 언 인사들 대화 불법도청제하 기사 참조.

조선일보 2005.7.21 발칵 뒤집어진 삼성테이프 내용, 사실과 달라제하 기사 참조.

2005. 7.22 자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전문 참조.

주간동아 2005 8,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도 도청했다제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