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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1 펜실바니아의 어느 시골에서

57. 정치적 망명을 선택하다

지난 2003 2, 노벨상 공작과 대북 비밀송금에 대한 글을 올리고 난 후, 나는 우리 정부로부터 국정원직원법상 직무상 취득한 비밀 누설금지 위반과 일부 직원으로부터 형법상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나는 고발장을 직접 받지는 못했지만, 서울지방검찰청으로부터 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언론도 나에 대한 고발 사실을 보도했다.

나는 유 모 담당 검사에게 전화하여 나에 대한 고소 사실을 문의했으나 그는 확인해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명백히 명예훼손을 했구먼”이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명예훼손은 주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는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명예훼손은 진실을 밝혔을 경우에도 성립할 수는 있느나 그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경우 성립하지 않는다.[1]

나는 이 일로 인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조국에서 쫒겨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았다. 일말의 사익이 없이 우리의 처참한 안보현실을 있는 그래도 밝힌 것으로 모두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다. 나와 내 가족은 이 일로 인해 많은 희생과 피해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밝힌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 공익에 부합하는 내용인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아니한 채 이처럼 유죄의 예단을 하는     검사의 무성의하고 저열한 태도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노벨상 공작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는커녕, 내가 노벨상 공작의 주요 인물로 지목한 박경탁씨는 2001 4, 이스라엘 대사로 영전되어 나갔다. 이리저리 조금이라도 관여했던 인사들은 모두 영전되었다. 대북 비밀송금에 대해서는 특검의 수사가 이루어져 일부 내용이 확인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도체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도 없이 명예훼손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국정원은 나에 대해 “정보업무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이상자”라고 낙인 찍었다. 김한정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삼은 도덕적으로 비열한 사람이다”라며 나를 비난했다. 그 후에도 그들은 “김기삼은 그런 정보에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어거지를 썼다. 어째서 어느 위치에 있어야만 그런 일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그들은 내가 돈이나 바라고,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사람으로 폄하했다. 명예훼손이라면 그들이 나에게 범한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2003 1, 내가 일련의 글을 발표하고 난 후, 워싱턴에서도 일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는 몇몇 미국의 언론인과 전 현직 관료들 중에서 나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대북송금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던 미의회연구소 닉쉬 선임 연구원도 만났다. 의회 보좌관 중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이리저리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이 즈음 회사 내부에 있던 지인이 나의 신변을 걱정하는 메일을 보내 왔다. 나는 김대중 측의 보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에는 “모 권력 실세가 운영하는 청부업자가 있다더라”하는 소문도 들렸다. 미국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조심하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다니던 학교엔 결석이 잦아졌다. 얼마 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출석 미달로 제적되었다.  

2003년 후반기에 다시 학적을 회복하기 위한 수속(Reinstate)을 밟았다. 이민국 심사관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쓰고 비자회복을 신청했다. 그런데, 이민국의 심사관은 “당신은 나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다시 학생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망명을 신청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연락해 왔다.

나는 그때까지 망명이라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망명이라면 제 3세계나 공산권 출신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자유 대한민국 출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로 보였다. 한미 동맹을 생각하더라도 망명이 쉽게 받아들여 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더욱이 전직 정보요원이 망명을 꿈꾸기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변호사와 상담해봐도 내가 동맹국의 전직 정보기관 요원이기 때문에 망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추방을 피하려면 일단 망명신청부터 해야 했다.

 지난 2001년 벌어진 9/11 사건 이후, 미국 사회는 외국인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자세로 돌변했다. 내가 망명을 신청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민국은 나를 추방절차(Removal Procedure)에 집어 넣었다. 예전 같으면 추방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불법체류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주었겠지만, 언제부턴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그들은 나를 즉각 추방재판에 회부했다. 일단, 추방절차에 들어가면 망명심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2004 1, 나 대신 나의 가족이 망명을 다시 신청했다. 우리 가족은 2004 3, 뉴저지 망명사무소에서 망명심사 인터뷰를 했다.

보통의 경우 인터뷰를 하고 나서 2 주 후면 결과를 통보 받는다. 대개는 망명거부 통보를 받게 된다. 우리 가족은 인터뷰를 한 지 2주 후, 결과를 확인하러 뉴저지 망명사무소로 찾아갔다. 망명사무소 담당관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집에 가서 기다리면 우편으로 결과를 통보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우체통을 쳐다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내의 세월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여러 통로로 우리 가족의 망명 심사결과를 문의했지만 이민국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마 그들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결정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도 곤혹스러운 처지였울 것이다. 나에게 망명을 허용하게 되면 한국 정부를 물 먹이는 결과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을 망명신청을 거부하여 내가 한국에 돌아가 처벌받을 경우,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미국 정부도 어쩔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에 대한 추방절차가 진행되었다.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나의 가족의 판결을 기다리느라 나의 재판을 십여 차례나 연기하였다. 더디어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판사는 2008 4 15일 더디어 나에게 망명을 허락해 주었다. 북한 인권 운동을 하시는 남신우 선생과 수잔솔티 여사, 척 다운스 씨등 나를 위해 증언해 주고 탄원해 준 분들의 도움이 컸다.

나의 재판의 판사는 허니맨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태인이었다. 보기만해도 제대로 할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민판사로서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허니맨 판사는 그의 판결문에서 나의 사건이 자신의 재임 중에 가장 증거자료가 완비된 사건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재판이 끝나고 나서 잡담 중에 내 사건이 자신의 재임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미국 정부가 나의 결정에 항소를 했다. 항소 이유는 네 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내가 미국에 입국하면서 전직 정보요원을 신분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와중에 한국의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 주요 이유였다. 이민항소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는 데는 정확히 2년이 걸렸다. 2010 4 15, 항소위원회는 세 가지 항소이유는 기각하고 한국의 정권이 바뀐 점을 고려하여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하여 다시 한 번 재판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1심 법원으로 환송했다. 나의 사건은 아직 계류 중이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우리나라 형법 31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