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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1 펜실바니아의 어느 시골에서

55. 무기도입 비리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

2003, 특검이 허무하게 끝나고 그 해 연말이 됐다. 갑자기 청와대에 소속된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무기비리에 대해 수사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 정권에서 정신을 차리고 뭔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가 싶어 한 때나마 약간의 희망과 설렘이 다시 일었다. 참여정부에 참여한 부산 출신 인사들이 뭔가 제대로 하려는가 보다고 기대되었다. 그래서, 이호철 민정 비서관에게 e-메일을 보내, “수사에 협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도 즉각 관심을 표명해 왔다. 몇 차례 e-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국방비리만 근절하면 국방예산 10% 증액이 온다는 마음으로 타협을 하지 않고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건너 가겠다까지 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후 외교부의 청와대 항명사건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연락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얼마 안가 비서관 직을 그만 두었고,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국방부 품질관리소장을 역임한 이원형 씨가 혼자 뒤집어 쓰는 형국이 됐다. 결국 기대할 게 없었다. 

2004 5, 나는 그 동안 수집해 왔던 무기도입 비리 의혹을 장문의 글로 정리하여 몇 차례에 걸쳐 인터넷에 올렸다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수사했던 올리컨포 개량사업, 케이블 어셈블리 납품사업, 견인소나 시스템 납품사업 등 세 가지 사건 뿐만 아니라, 김영삼과 김대중 정권에서 벌어진 굵직한 여덟가지 무기도입 비리 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히 썼다. 글의 말미에는 작심하고 전직 대통령들의 해외 비자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이 부분을 수사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나는 몇 편의 글을 발표하면서,“우리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손에 개혁의 칼을 쥐어 준다”는 심정이었다. 나는 노 대통령이 전 정권에서 저질러진 거악들을 척결해 주기를 기대했다. 왠일인지 어쩌면 그라면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의 바램은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애초에 기대 난망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노 대통령은 대북송금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척 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었다. 아마 갓 정권을 잡은 그에겐 너무 무거웠나 보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가볍고 잘 드는 칼을 제시해 주는 마음으로 무기비리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칼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후 문재인 민정수석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거듭 수사해 줄 것을 촉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해 여름, 반가운 사람이 찾아 왔다. 국방부 검찰단 고등검찰부장 대리로 재직중이던 최강욱 소령이었다. 무기비리에 대해 직접 조사하기 위해 펜실바니아 시골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 준 것이었다. 그는 군대 내 비리를 척결하고자 하는, 소신과 열정과 사명감을 가진 장교였다. “깡다구하나는 대단한 친구였다. 앞서 그는 공금횡령을 이유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었던 4성 장군을 구속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생면부지였지만, 우리는 만나자마자 말이 통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의 대학교 후배이자, 나의 회사 친구인 Ο용태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 대해,“떠나기 전에 용태형으로부터, 언론에 알려진 것과 같은 골통은 아니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우리는 카일라일의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무기비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의있게 얘기해 주었다.

그 즈음 시사저널이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후속 취재를 했다. 그 잡지의 탐사전문 기자인 정희상 씨가 멀리까지 찾아와 주었다. 그는 기자정신에 충일한 사람이었다. 한국 사회의 부패 실상과 특히 무기도입 비리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기사가 나가자 국방부는 이례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끝내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참 지난 후, 그는 나의 국정원 체험기의 요약본을 시사저널에 싣기도 했다. 

나는 그 글에서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의 규모와 소재지 등을 대략 설명했다. 재미있었던 사실은, 내가 글을 발표하고 난 후의 그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내가 글을 발표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스위스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스위스 방문이 그의 비자금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이후에도 비자금이 예치되어 있는 지역 주위로만 여행을 했다. 어느해에는 오끼나와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아마도 홍콩과 가까운 여행지라서 그기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비자금이 대만에 있다고 했는데,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만을 방문했다.

한편, 지난 2006 6, 저스틴 림씨 등 일부 뉴욕 교민들이 서울 프레스센타에서 김대중 비자금 뉴욕 유입사건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3억불 규모의 김대중 대통령의 비자금이 미국 내 부동산에 투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직접 비자금을 날랐다는 사람이 나타나 양심고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이른바 뉴욕의 괴자금은 김대중의 비자금이라기보다는 그 측근들의 자금이 가능성이 커 보였다. 부동산에 투자된 액수를 모두 합산하다보니 액수도 좀 과장된 게 아닌가 싶었다. 

지난 2008 10 20, 한나라당의 주성영 의원은 국회 회기 중에 김대중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다음날 주 의원은, “20063월 초 전직 검찰 관계자로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의 일부인 100억 짜리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4] 내가 확인한 바로는, 주 의원이 언급한 검찰 관계자도 다름 아닌 앞에서 언급한 박주원 씨였다.  검찰 조사 결과, 그 증서는 비자금과 관련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비자금 의혹이 말끔히 해결된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 2007 1월 월간조선은 김대중 정권 당시 정부기관 고위 인사의 전언을 토대로 김대중 정권이 2001년 국내 금융기관을 통해 3,0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놀랄만한 기사를 실었다.[5]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 내용을 제보한 정부의 고위 인사는 국정원의 국내 담당 차장을 지낸 김은성 씨였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결코 허튼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한 때나마 김대중 정권의 최고 핵심 정보를 관장했던 사람이다. 그것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철저히 망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증언이 지니는 남다른 무게는 그가 가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내가 좀 더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지난 2001 여름 즈음, 김은성 차장은 경제 부서의 수집관으로부터, “청와대의 지시로 시중의 6개 은행이 각 5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그는 이 첩보를 신건 원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청와대의 이기호 수석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기호 수석은,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모르는 일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기호 수석이 당시 국정원의 경제단장이었던 김여Ο 씨를 통해 이 일을 직접 챙겼다고 한다.

애초 이 자금은 김대중 정권이 대북 송금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 후 어느 경제 부처의 장관급 인사가 언론에 확인해 준 바에 의하면, 이 돈이 실재로는“2002년 대선 준비자금이었다고 한다. 김대중 정권은 2002년에 선거자금을 모금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2001년부터 미리 그런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 용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자금은 결국 집행되지 않았고 김대중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나는 그 후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이기호 수석의 근황을 은밀히 추적해 본 적이 있었다. 2008년 겨울, 약간의 노력에 행운까지 더해져 나는 페어펙스에 있는 그의 소재지를 어렵게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이 끝날 즈음에 유럽으로 출국하여 2년여 동안 머무르다가, 귀국하지 않고 2005년 경부터 워싱턴으로 옮겨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헤리티지 재단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연구소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출근했다. 교포 한인들과도 일체 교류하지 않았다. 집도 여러번 옮겼고, 전화번호도 자주 바꿨다. 이를테면 그는 극도의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 언론사 기자와 함께 그의 집 앞에서 그와 통화를 시도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3000억원 모금설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의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 신건 원장에게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의 과장된 부인이 그의 연관성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기호 씨에 대해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에게는 그를 내사할 수 있는 돈도 시간도 인력도, 그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그의 뒤를 캐려다 내가 먼저 당할 수도 있었다. 언젠가 그가 송환되어 정식 조사를 받을 때가 있기를 기원하는 일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부 양심선언 중 무기의 그늘, 부패의 온실참조.

시사저널 2004. 5. 11. “<시사저널>이 추적한 무기 도입 비리제하 기사 및 2004. 6. 6. 무기도입 ‘6천억원 사기극전모제하 기사 참조.

시사저널 2006. 1. 6. 김기삼 씨의 국정원 8년 체험 수기제하 기사 참조.

평화방송 라디오 2008. 10. 21. 열린 세상 김석우입니다방송 내용 참조.

월간조선 2007 1월 호 김대중 정권 정부 고위인사 충격 증언제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