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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1 펜실바니아의 어느 시골에서

53. 양심선언의 언저리

노벨상 공작과 대북송금에 대한 나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가자 애국적인 네티즌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표명해 주었다. 대선 패배에 의기소침해 있던 그들에게는, 마치 청량제 같은 정보였을 것이다. 여러 인터넷 신문들이 나의 글을 전제하고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다. 특히 인터넷 독립신문과 사이버뉴스24라는 매체가 열심이었다. 개인 네티즌들이 이 글들을 퍼다 날랐다. 설연휴가 지나자 일간지들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후속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모 전직 장관급 인사의 아마도 이정빈 전 외교장관이라고 짐작되지만 언급을 기사화 하면서,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을 기정 사실화하는 보도를 내 보냈다.  역시 앞뒤 안가리고 나가기로는 동아일보를 따를 언론이 없었다. 동아는 또한 동티모르에서의 김한정의 여러 활동도 취재하여 기사화 하기도 했다. 예상한 대로, 김한정은 이에 대해 모든 일을 부인으로 일관했다.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며 많은 관심을 표시해 주었다. 특히, 월간조선은 즉각 후속 취재에 나서2003 3월 호에서 장문의 상세한 후속 기사를 게재했다. 그 기사는 국정원의 노벨상 로비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고도 정확하게 기술한 것이었다. 약간 아쉽기로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취재내용을 확신하지 못해서인지 기사의 톤이 조금 낮은 점이었다. 그 후에도 월간조선은 후속 취재를 계속하여 2004 11월 호에서 다시 기사화 하기도 했다. 

나의 양심선언이 나가자, 국정원과 청와대는 나를 악랄하게 음해했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심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 “정신이 불안정하다”, “업무에 부적응한 사람이다”, “도덕적으로 비열한 친구다”, “돈을 노리고 했다”, “정치권에 줄대려는 자다등 온갖 험구를 쏟아 냈다. 하지만 그들은 돈 떼먹고 튄 놈이라거나, “여자 건드리고 달아난 놈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전형적인 레파토리인데도 말이다.

그 때 국정원에서 오래 전에 퇴사한 박지О 선배가, 국정원 안의 분위기를 e-메일로 전해 왔다. 그가 전한 소식에 의하면,“국정원 지휘부와 청와대 부속실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설 연휴를 악몽같이 보냈다”고 한다. 또한,“국정원의 최명주 1차장과 해외공작국 한병О 행정팀장 등이, ‘김기삼이를 죽여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그 소식을, “국정원 안에 있는 산적 같이 생긴지인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일련의 글을 발표하고 난 후 세계 각지로부터 많은 메일을 받았다.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프랑스에서 메일을 보내온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나를 비난하는 내용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나의 용기를 격려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들은,“진실과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는,“간첩신고를 했지만, 햇볕정책 때문에 오히려 국정원으로부터 구박을 받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분도 있었다. 이 지면을 빌어 나에게 성원과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인터넷을 글을 올리고 나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만한 사람을 찾아 보았다. 내가 모셨던 오정소 차장이 생각 났다. 그에게 전화하여 글을 쓴 동기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에게서 싸늘한 대답이 돌아 왔다. 그는 나에게, “안에서 다 알아서 할 텐데, 왜 밖에서 떠드느냐?”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마치 나의 활동으로 인해 노무현 정권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려던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투였다. 할 말이 없었다. 그것으로 오 차장과의 인연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2005년 국정원 도청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오 차장을 변호하지 않았다. 이미 이 때 그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사라진 탓이었을 것이다. 

내가 올린 글에 대해 한국의 기자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다. 그 중에서 한국일보의 이 모 기자는 하이얏트에 장기 체류하던 한국계 프랑스인에 대한 후속 취재 결과를 나에게 알려 왔다. 그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마담 정이라고 불리는 여자로, 프랑스 고위 관료의 며느리라고 했다. 그녀는 명동 외환시장에서는 유명한 인물로, “정권의 돈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 후 특검에서는 이 부분을 수사하지 않았고, 이 여인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일보의 또 다른 배 모 기자는, “김한정이 김 선배를 체포하기 위해 체포팀을 파견했었는데, 이미 공항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체포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알려 왔다. 안에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연락해 본 결과, 터무니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나를 만났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은 해당 부서에서 구두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나로 인해 고통과 불편을 겪었을 동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노벨상 공작에 관한 글을 발표하면서, 나는 보호해야 할 몇 사람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나는 해외공작실 동구과 북구팀에서 노벨상 공작의 모든 실무를 담당한 차병О 직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나와 가까운 입사동기였기 때문에, 차마 그를 언급할 수가 없었다. 아마 나의 글이 나가고 난 후, 그는 감찰실에 불려가 꽤나 시달렸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그는 사실 나의 글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평소 차 직원은 자신이 노벨상 업무의 실무자이면서도 그 일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뜬금 없이, “형, 김한정이가 자꾸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물어 왔다. 그는 나와 같은 동기이지만, 나를 부를 때에는 항상 이라고 불렀다. 내가 저보다 몇 살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신세대 오렌지요원이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뭐 그런 걸 고민하냐. 밥 먹자고 하면, 그냥 같이 먹으면 되는 거지”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다음해인 2001년 도에 차 직원은 사무관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노벨상 공작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갔던 인사들은 저마다 훈,포장을 받고 난리를 쳤는데, 실무 직원은 고작 사무관 진급도 못한 것이다. 노벨상 공작에 관해 모든 것을 비밀로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사 부서에 미처 그의 공적을 보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대책이 마련되었다. 연수를 가장하여 그를 해외로 내보내기로 했다. 혼자 연수 보내면 이상하게 보일까봐 부서의 다른 동기들도 덩달아 보냈다. 웃지 못할 헤프닝이었다. 

또한, 나는 노벨상 공작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김영Ο 박사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그는 나의 존경하는 선배이자 직속 팀장이었다. 내가 친형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종일 차장과 권진호 차장에게 직보하면서 노벨상 업무와 관한 국정원과 청와대간의 모든 연락업무를 맡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는 국정원의 외신대변인을 맡기도 했었다. 그는 나의 글이 발표되고 난 후 이제까지 인사상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지금까지 최소한 두 차례 이상 감찰실에 불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이 글을 빌어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김영О 박사라는 연결고리를 제외하다 보니, 나종일 차장과 권진호 차장에 대해서도 자세히 쓸 수 없었다. 사실 국정원 내에서 노벨상 공작의 실질적인 최종 책임자는 나 차장과 권 차장이었다. 특히 나 차장은 노벨상 수상의 일등 공신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노벨상 공작의 초기, 공작을 기획하고 추진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햇볕정책에 관해서는 임동원 씨와 견해가 달랐기 때문에 둘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임 원장의 특보로 재임명되어 회사 바깥에 사무실을 차리고 활동했다. 권진호 차장은 나 차장에 이어 국정원 내 공작을 총 지휘하고 마무리하였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이들은 정보기관의 요직을 맡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신도 없었고 배짱도 없었다. 요즘 보면 의리도 없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지난 참여정부에서, “나종일과 권진호 두 안보보좌관이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NSC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나는 가끔‘내 글에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더면, 이들이 노무현 정권에서 안보의 최고 책임자로 일할 수 있었을까?’하고 상상해 보곤 했다. 

노벨상 공작의 최고의 수훈갑은 아무래도 임동원 원장이었다. 그는 햇볕정책이 김대중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기만정책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반역적인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정권이 바뀌고 난 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사람들이 왜 나를 미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 한다고 한다. 그는 그 후 『피스메이커』라는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그 만큼 자기 보호와  자기 변명이 절실했던 모양이다.

        나는 임동원 씨의 간첩혐의에 관한 글을 공개하고 난 후 믿을만한 출처로부터, “임동원이 90년대 초 남북합의서 문제를 협의하러 평양에 드나들 때, 양각도 호텔 지하에서 북한 정보기관으로부터 북한의 가족과 관련 협박을 받고 굴복한 것으로 안다”라는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한참 지난 후 국내 정보 계통의 고위 인사로부터도 그런 정보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적도 있다. 훗날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고 난 후, 평양의 3호 청사 내  캐비넷이 열리게 되는 날, 이 모든 일들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조선일보 2003. 2. 3. 자“DJ 노벨상 수상하려 北에 15억弗 송금”제하 기사 참조.

동아일보 2003. 2. 3. 자  “북한에 거액 비밀지원 DJ 노벨상 수상 공작”; 2003. 2. 4. 자 “노벨평화상 공작설 일파만파”, “김기삼씨 – 국정원 공방”, “청화대 실장 로비했다”; 2003. 2. 5. 자  "김실장, 동티모르 의사당 건립 건의", “ 노벨상 로비의혹 청와대 실장 "생트집" 반발,  “DJ 노벨상과 동티모르 관계는”; 2003. 3. 26 자 비화 국민의 정부 <13> “DJ 노벨상 수상 막전막후” 제하 기사 참조.

월간조선 2003. 3월 호 김대중 노벨상 국제로비 진상제하 기사 참조.

월간조선 2004. 11월 호 김대중 노벨상 수상로비와 국정원의 역할제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