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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8.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

41. 남북교류 현장의 이모저모 각설하고, 전략국에 전입하자마자 나는 제 1차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준비하는 상황실에 배속되었다. 상황실장은 김만복 과장이 겸했다. 이 행사는 남북한이 어떻게 교류하는 지를 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황실에서의 행사준비는 전략1과 직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부서에서 행사 진행요원으로 차출되어 파견 나온 수십 명의 직원들도 같이 근무했다. 수송, 통신, 안전 등 행사지원 부서에서 파견나온 직원도 있었고, 홍보를 담당하기 위해 국내 부서에서 언론을 담당하러 나온 사람도 있었다. 행사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독일에 주재하는 파견관으로부터, “류미영 천도교청우당 당수가 북한의 인솔단장으로 올 예정이다”라는 첩보가 들어 왔다.[1] “독일에 있는 류미영의 아들이 북한의 정보기관 고위 간부인.. 더보기
40. 통일운동가들에 대한 단상 대북 첩보 가운데 가끔은 혼자 읽기 아까운 것도 더러 있었다. 그 중에서 황 모 씨에 대한 첩보는 좀 소개할 만 하다.[1] 황 모 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좌파 문학인이다. 나는 국정원에서 좌파 인사들의 도덕적 일탈과 위선을 알게 되어 실망한 적이 많았는데, 그도 그 중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그는 1980년대 말 무단으로 밀입북 했다가 돌아온 후 투옥되었는데, 요즘도 반성은커녕,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내가 읽은 첩보에 의하면, 북측의 모 인사는 황 씨를,“썩어 문드러진 자본주의의 도덕관념을 가진 XX”라며 경멸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이랬다. 그가 이른바 통일운동을 한답시고 북한에 체류 중일 때, “북측 요원들에게 사흘 밤이 멀다 하고 아리따운 처녀를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더보기
39. 대북전략국 전략1과 대북전략국으로 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전략국장은 서영교 씨였다. 나는 감찰실에서 전략국을 담당하고 있던 친구 이창О에게, “전략1과에 가고 싶으니, 서 실장에게 얘기 좀 잘 해라”라고 부탁했다. 예상한대로 서 실장은 감찰실 수집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자리를 차지하는 중견 간부도 아니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략국은 그때 대북 관련 행사가 폭주하는 바람에 인력이 태부족한 상태였다. 전략1과는 대북전략국의 핵심과였다. 당시에는 아직 회담조정관실이 설립되기 이전이라 대북 협상의 기획과 뒷조율은 모두 이 과가 도맡아서 했다. 과장은 김만복 씨였다. 김만복 과장 이전에는 전옥현 씨가 했다. 그 전에는 서영О .. 더보기
38. “니가 그리 잘 났냐” 그 즈음 나의 퇴사 결심을 확고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는 출신 지역 때문에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불쾌한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권진호 차장이 부임해 왔을 때, 나는 그의 보좌관으로 내정되어 그에게 부임인사까지 마쳤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인사가 없던 일로 되었다. 아마 나의 출신 지역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진로문제에 대해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었는데, ‘퇴사할 때 하더라도, 남북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0년 7월경 대외협력보좌관실이 해체되자전략국으로 전출해 주기를 행정과에다 요청했다. 나의 전출 희망을 접한 행정과는 황당해 했다. 국정원.. 더보기
37. 국정원, 햇볕의 비탈에 서다 그 즈음 나는 퇴사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모두 새천년의 희망에 들떠 있던 와중에, 나는 김대중 정권의 행태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햇볕정책이란 이름의 기만적인 대북정책이, 노벨상을 타기 위한 속임수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북한의 참상을 하나 둘 확인하게 되면서, 이 위선적인 정권에 구역질이 더해 갔다. 마음 속에서,‘과연 자신의 노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 이익을 희생시키는 대통령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민족의 이익을 배신하고 반역의 종범 노릇을 하는 조직에 언제까지 몸담아야 하는지?’, ‘간첩이라는 의심이 드는 원장 밑에서 계속 일해야 하는지?’이런 저런 회의감이 쉴 세 없이 밀려왔다. 딱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더보기
할일을 잃다 99년 5월 말, 천용택 원장 부임하여 노벨상 공작을 전면 중단시키자, 우리는 졸지에 할 일을 잃어 버렸다. 겉으로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시늉을 냈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두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렸다. 사무실 멤버들은 하나 둘씩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같다. 먼저, 같이 일하던 박 선배가 원장 통역관 자리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잘렸다. 그는 어느 날 통역하려 들어갔다가 원장 비서실로부터“오늘부터 통역을 그만두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졸지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잘린 것이다. 그의 후임으로 정협과에서 일하던 전문직 여자 통역관이 임명되었다. 그녀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통역을 바꾼 이유를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그 이유라는 게 기가 막혔다. 천 원장이 “통역의 악센트를 마음에 안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