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8.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

할일을 잃다

99 5월 말, 천용택 원장 부임하여 노벨상 공작을 전면 중단시키자, 우리는 졸지에 할 일을 잃어 버렸다. 겉으로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시늉을 냈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두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렸다. 사무실 멤버들은 하나 둘씩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같다.


먼저, 같이 일하던 박 선배가 원장 통역관 자리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잘렸다. 그는 어느 날 통역하려 들어갔다가 원장 비서실로부터오늘부터 통역을 그만두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졸지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잘린 것이다. 그의 후임으로 정협과에서 일하던 전문직 여자 통역관이 임명되었다. 그녀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통역을 바꾼 이유를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그 이유라는 게 기가 막혔다. 천 원장이 통역의 악센트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경상도 출신이라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박 선배는 미국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까지 했다가, 뒤늦게 안기부에 입사한 사람이었다. 영어 통역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 이종찬 원장은 그의 업무능력을 높이 사 그를 특진시키려고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이 일로 해서 자존심 강한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다음해 사무관 진급에서 낙방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가 진급을 못한 이유를 알아 보니 개인평가가 좋지 못했다. 대외협력보좌관이 나에게 A를 주느라 박 선배에게 C를 준 것이 결정적인 이유었다. 당시 인사규정에 의하면, 같은 팀에서 한 명에게 A를 주면, 다른 사람에게는 무조건 C를 주기로 되어 있었다. 비록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에게 미안했다.

 

나에게도 권진호 차장의 비서실에서 차장 보좌원으로 오라는 제의가 들어 왔다.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던 차에 잘됐다 싶어 그 제의에 응했다. 며칠 후 전입 인사차 차장실에 들어갔더니 권 차장이, “안녕하신교? 어서 오이소!”라며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내며 인사를 건네 왔다. 그의 책상 위에는 나의 노란색 인사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며칠 후 나의 인사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김 박사와 후배 여직원은 권진호 차장 직속으로 분리해 나갔다. 김 박사는 차장실 맞은 편에 사무실을 차리고 노벨상 공작 관련 청와대와의 연락업무를 계속했다. 그의 사무실 문에는 문패 대신 『관계자외 출입엄금』이라는 표시가 나붙었다. 그의 방은 회사 내에서 몇 곳 안 되는 비밀의 방이 된 셈이다. 나는 물론 더 이상 관계자가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안면으로 무단 출입했다.

조준오는 정보비서관실로 옮겨 거기서 행정관 노릇을 했다. 그는 나이 들어 행정관으로 일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 사무실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성격 탓인지 다른 직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듯 했다. 그는 틈만 나면 우리 방으로 놀러 와서는,“연예계 담당 수집관이나 하고 싶다며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딴 생각 말고 정보비서관실 일이나 잘 배우라고 충고해 줬다. 그러다, 그는 보안사고를 냈다.

조준오는 정규과정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도무지 보안의식이란 게 없었다. 그는 김한정이 퇴사하고 난 후에도 계속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 사업을 돕고 있었다. 둘은 서로 빈번히 전화연락도 하고, 밖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는 눈치였다.

언젠가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일 때 그는 김한정에게 국제전화를 하면서, “대통령이 해외로 나가고 나니, 여기 있는 놈들은 군기가 완전히 빠졌다등의 얘기를 떠들었다고 한다. 아마 그로서는 과학보안국에서 듣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제전화로 내부사정(?)을 얘기한 죄로 그는 정보비서관실에서 쫓겨 났다. 그리고는, 내가 일했던 해외공작국 정보협력과로 잠시 옮기더니,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냈다.

그는 국정원을 퇴사하고 아시아나 항공에 재취업했다. 지난 2000 6월 남북정상회담에 아시아나의 전용기가 동원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는 아시아나에서 일하면서도 한동안 김한정의 조수 노릇을 계속 했다. 언젠가 그는, “청와대를 사칭한다는 혐의로, “사직동 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1]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1999.12월 말, 임동원 원장이 부임하고 희망찬 새천년이 밝아왔는데도 대외협력보좌실의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이라곤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인원이 줄어 들고 소속도 원장 직속에서 해외공작국으로 변경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무실의 규모가 축소되고 지위가 강등된 것이었다. 남아 있던 인력들은 별달리 하는 일 없이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사무실 TV에는 늘상 골프채널이 켜져 있었다.  

그러다, 결국 2000 7월경 이종О 대외협력보좌관이 옷을 벗으면서 사무실 자체도 해체되고 말았다. 인원들은 모두 해외공작국으로 원복하기로 결정되었다. 북미과의 조병О 1계장이 두 번씩이나 전화하여, “같이 일하자고 부탁해 왔다. 나는 북미과에서 일하는 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마침 행정과에서 일하던 동기인 김경О이 북미과에 관심이 있길래 나 대신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도 다른 이유로 결국 가지는 못했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1] 김한정은 2000년 중반, 조준오를 대신하여 김형민이라는 인물을 새로 조수로 채용했다. 김형민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외환은행 부행장을 지냈다.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론스타의 소위 검은 머리 대주주가 김대중일 것이라는 추측이 드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