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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8.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

39. 대북전략국 전략1과

대북전략국으로 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전략국장은 서영교 씨였다. 나는 감찰실에서 전략국을 담당하고 있던 친구 이창О에게, “전략1과에 가고 싶으니, 서 실장에게 얘기 좀 잘 해라라고 부탁했다. 예상한대로 서 실장은 감찰실 수집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자리를 차지하는 중견 간부도 아니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략국은 그때 대북 관련 행사가 폭주하는 바람에 인력이 태부족한 상태였다. 

전략1과는 대북전략국의 핵심과였다. 당시에는 아직 회담조정관실이 설립되기 이전이라 대북 협상의 기획과 뒷조율은 모두 이 과가 도맡아서 했다. 과장은 김만복 씨였다. 김만복 과장 이전에는 전옥현 씨가 했다. 그 전에는 서영О 국장과 김보현 차장이 거쳐 갔다. 대한민국의 안보전략의 최고 핵심 실무자들이 모두 전략1과장을 거쳤던 셈이다.

전략국은 국정원 내에서 별로 선호하는 부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쓸만한 인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계장 몇 명 정도만이 제대로 보고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장이나 실장은 이들만 끼고 일했다. 자연히 “5공자, “7공자니 하는 말들이 생겼다. 

내가 전략국으로 전입하자 회사 내에 몇 명 되지 않는 서울법대 출신이 같은 과에 근무하게 돼서 그런지, 주위 사람들이 보는 눈이 약간 이상했다. 게다가, 내가 김만복 과장처럼 해외공작실에서 건너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김만복 과장이 후배를 끌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나는 전입하기 전에 김만복 과장과 아무런 상의를 하지 않았다. 해외공작국에서 쫓겨온 처지라서 그런지, 그는 오히려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말이 나온 김에 김만복 원장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본래 국내 부서 학원과 수집관이었다. 그는 정보학교에서 영어 연수 후, 해외공작국으로 옮겨 갔다가 워싱턴으로 파견 나갔다. 1996 8월 초, 워싱턴에서 귀국하면서 해외공작국 지원조정과장으로 발령받아 복귀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그가 내곡동 신청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마침 당직 근무를 서고 있다가 그와 첫인사를 나눴다. 그의 새로운 사무실까지 내가 직접 안내까지 했다. 내가 학교 후배입니다며 내 자신을 소개하자, 그는그래, 여기는 똑똑한 사람들이 일해야 하는 곳이지라고 말했다. 그는 김영삼 정권 말기, 해외공작국 행정과장을 역임했다.

정권이 바뀌자 그에게도 시련의 시간이 왔다. 전라도 출신 점령군들이 노골적으로 그를 구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전략국으로 피신을 가서 전략1과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게 새옹지마가 되었다. 남북뒷거래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전략국이 핵심 부서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인적으로 일했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에 출근하는 생활을 2년여 동안 반복했다. 그리하여 그는 남북관계의 최고 전문가로 변신했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뒷거래 작업은, 임동원 - 김보현 - 서훈 라인이 협상을 주도했고, 서영교 - 김만복 두 사람이 후속 뒤처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김만복 전략1과장은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행사, 그리고 후속 경제회담 등을 마친 뒤 다음해 단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진급하자마자 건강을 핑계로 못하겠다며 드러누웠다. 세종연구소에 자리를 하나 마련하여 몸을 피했다. 정권이 바뀌고 나면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영교 국장은 김만복 단장의 공백으로 혼자서 일을 처리하느라 과부하가 걸려 병원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전략국에서는 다시는 해외공작국 출신 간부를 받지 않겠다며 김만복 과장의 배신을 비난했다. 마침 전옥현 과장도 그 전에 비슷한 전철을 걸어간 적이 있었다.

김만복씨는 세종연구소에서 이종석과 친분을 쌓은 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승승장구했다. 청와대 정보관리실장으로 일하면서는 그의 장기인, “야전침상을 깔았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는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컴백했다가, 금새 해외차장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국정원장으로 승진했다. 국정원장으로서 그의 행적은 한마디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어찌됐던, 그는 국정원 직원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셈이다.   

 나는 전략1과에 출근하자마자 캐비넷에 보관되어 있던 비밀문서부터 재빨리 읽어 나갔다. 일요일에도 혼자 출근하여 공부(?)했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의미 없는 문서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정보들이었다.

나는 남북정상회담 회견문건부터 살펴 보았다. 그것은 평소 내가 제일 궁금해 하던 것이었다. 그 문서는 전략1과 직원들이 정상회담 테이프를 푼 녹취록이었는데, 청와대 등 극히 제한적인 곳에만 한정 배포한 1급 비문이었다. 1급 비문은 국정원 내에서도 그리 흔한 문건이 아니다.

나는 또한 황장엽 선생과 김덕홍 선생의 디브리핑 책자도 읽었다. 디브리핑이란 사후에 일의 경과를 보고하는 절차이다. 그 책자를 읽고 나서 그가 왜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망명을 결심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진심을 알고 나서, 그를 존경하게 됐다.

나는 틈만 나면 대북 첩보보고서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국내부서나 해외부서에 근무할 때에는 대북첩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으나, 전략국으로 전입하고 나서는 대북첩보를 열람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나는 대정실 보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도 단편적인 대북 정보를 읽었기 때문에 북한의 사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1994, 함경도 어느 지역의 군부대를 감청한 보고서에서, “군인들이 신발이 없어 고무 타이어를 잘라 동여 매고 다닌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북한국 친구로부터 북한의 사정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북한은 이미 90년대 초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거지군대가 따로 없었다. 북한 군인들은 영양실조로 인해 난쟁이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른바 영실(영양실조의 준말) 군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병들의 평균 체중이 50 킬로그램도 안 된다는 충격적인 얘기도 나돌았다.[3] 직접 대북 첩보 보고를 읽어보니,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절이 지난 후에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북한의 대남부서에 북한의 최고 인재가 모여 드는 것과 비교하면, 국정원 대북 부서의 현실은 한심한 수준이다. 아마 지금쯤 김정일도 이 정도는 이미 파악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국정원 직원들은 자기 일과 직접 연관된 자료가 아니면 손대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들과 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북한에서는 이를, “영실군또는강영실군이라고 비아냥댄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영양실조군대”, 혹은강한 영양실조 군대라는 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