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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8. 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

37. 국정원, 햇볕의 비탈에 서다

그 즈음 나는 퇴사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모두 새천년의 희망에 들떠 있던 와중에, 나는 김대중 정권의 행태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햇볕정책이란 이름의 기만적인 대북정책이, 노벨상을 타기 위한 속임수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북한의 참상을 하나 둘 확인하게 되면서, 이 위선적인 정권에 구역질이 더해 갔다.

마음 속에서,‘과연 자신의 노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 이익을 희생시키는 대통령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민족의 이익을 배신하고 반역의 종범 노릇을 하는 조직에 언제까지 몸담아야 하는지?’, ‘간첩이라는 의심이 드는 원장 밑에서 계속 일해야 하는지?’이런 저런 회의감이 쉴 세 없이 밀려왔다. 딱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상의할 사람도 없었기에 혼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소위 햇볕정책뿐만 아니라, 여러 국내정책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지역감정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 실망감이 더욱 깊어 졌다. 지역감정을 표출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거들먹거림도 더 이상 보기가 싫었다. 월급봉투 때문에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한다면,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결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의 과정에서 국정원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좀 살펴보았으면 한다. 소위 잃어버린 10간 국정원이 반역의 종범내지 반역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대한민국을 배신했던 발자취는 좀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취임하자마자 김정일의 눈치보기와 환심사기에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권 초 국정원의 조직을 개편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심리전국의 인원과 기능을 대폭 축소시켜 대북전략국에 편입시켰다. 대북 심리전을 원천 봉쇄하여 김정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대북공작국과, 대공수사국의 활동을 강력히 억제했다. 비록 이들 부서의 조직에는 손대지 않았지만, 거의 일할 수 없는 분위기로 몰아 사실상 식물부서로 만들었다.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일체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김정일 정권에 대한 공격과 수비 양쪽이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김대중은 스스로 인권 대통령을 표방했지만, 정작 북한동포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 자체를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중국을 떠도는 탈북 동포들의 참상도 의도적으로 외면하였다. 납북자나 국군포로에 문제는 한번도 제대로 된 항의를 하지 못했다. 항의는 고사하고 언급되는 것조차 철저히 회피했다.

이러한 굴욕적인 저자세는 소위 납조기 사건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입된 중국산 조기의 뱃속에서 납덩어리가 발견되어 온 나라가 온통 난리가 났다. 조기의 중량을 늘리기 위해 누군가가 고의로 납을 집어 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조기의 원산지가 중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중국은 단지 중계지에 불과했다. 허급지급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국정원이 정권 초기부터 햇볕정책에 목을 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엔, 국정원은 다소 애매하고 조심스런 자세를 취했다. 아직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의중을 드러내지 않은 데다, 이종찬 원장이나 나종일 차장이 햇볕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 우려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취임 첫 해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내의 정치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지나치게 급격한 정책 변화로 인해 색깔논쟁이 재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취임 초 남북간에 기싸움과 신경전의 결과로, 서해교전이 발발한 것도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져오는 데 장애가 되었다.

사실, 지난 제 1차 서해교전에서는 우리 해군이 눈치 없이너무 잘 싸우는 바람에, 김대중 정권이 오히려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국정원은 퇴각하는 북측 선박의 통신을 감청하여 북측의 피해상황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 해군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상자도 수도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우리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북측의 사상자 숫자를 줄여 축소 보도를 유도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김대중의 언사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김대중은 취임 초기 어느 사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6.25는 실패한 통일전쟁이라며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처음에는, ‘아마도 실수로 그런 말을 했겠지’, 또는 김정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랬겠거니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 했다.

그는, “5천년 민족사에 가장 추앙 받는 민족지도자가 되겠다는 빠져 있었다. 김유신은 무력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자기는 평화적으로 통일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 추앙 받고 싶어했다. 마치 노벨평화상을 목에 걸기만 하면, “세계적인 민주지도자내지는 “5천년 민족사의 최고 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처럼 생각했다. 나는 이미 노벨상 수상 공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이러한 의도가 너무나 확연히 보였다.  

그 즈음, 난 데 없이 제2건국위원회라는 것이 설쳐대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1998 10월 대통령자문기구로2건국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는 취임 첫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50년 사()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했던 파란의 시기였다"고 전제하면서, 이제부터 "2의 건국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다"고 천명했다.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었다.

관공서마다 제2건국위원회의 현판이 내 걸리고, 홍보 비디오가 상영되었다. 시골 마을 면 단위에까지 전국적인 조직망이 급조되었다. 어떤 부서에서는 제 2건국 활성화 방안이라는 걸 만들어, “추진실적에 따라 인사와 포상을 실시한다고 발표하는 촌극을 벌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2건국이라는 말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개혁과제의 발굴과 의식개조를 내건 국민의식개혁 운동이라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김대중을 우상화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2000년 중반, 내가 국내 부서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들기로는, 김대중은 국정원에다,“나를 김구보다 더 추앙 받는 민족지도자로 만들라고 은밀히 지시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난 후, “김대중의 망상이 노욕 수준을 넘어 아예 범죄 수준에 이르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과 더불어, 2000년도에 들어선 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이 물밑에서 은밀히 진행되었다. 1999 12월 말, 임동원은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해외의 모든 파견들에게, “북측과 대화통로를 개척하라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00 1월 중순부터 김보현 전략국장이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가족의 제사라든가 다른 개인적인 핑계를 댔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해외에서 남북간에 뒷거래가 시작되고 있구나하고 짐작했다. 국정원의 국장이 가족의 제사 같은 사소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000 2, 김대중이 직접 일본 TV에 나타나, “김정일은 식견 있는 지도자라는 요상한 얘기를 했다. 3월에는 독일까지 날아가 이른바 베를린 선언이라고 이름 붙인, 대대적인 대북 원조 제의를 발표했다. 그리고는, 총선을 사흘 앞두고, “남북간 정상회담을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 나는 이들이 노벨상에 눈이 뒤집혀 나라를 팔아 먹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에 남북정상회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런 움직임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총선을 일주일 여 앞둔 4월 초순경, 국내 부서의 어느 친구에게서, “총선 결과를 예상하는 종합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총선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획기적인 카드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친구는, 남북정상회담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얘기하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 카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다. 우리 국민이 그 정도로 정치적으로 둔하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보고서의 결론도 그런 방향을 쓰라고 조언해 주었다.

나는 선거 바로 직전에 그런 일을 발표해서는 역풍을 받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 후 실제로 선거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일부 경기 북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는 확연히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특히 경상도와 강원 지역에서 역풍이 심하게 불었다. 결국, 새천년민주당을 제 1당으로 만들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TV에서 보도되는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나는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비록 시간상으로는 간격이 있었지만, 국방부에도 유사한 조치가 취해졌다. 교전수칙이라는 미명하에 서해상에서 선제사격이 금지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계속 이어져, 노무현 정권 때는 휴전선에서의 심리전 활동도 전면 중단되었다. 남북 간 합의라는 미명하에 실시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양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