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7.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썸네일형 리스트형 36. 노벨상 드라마의 조연들 이제 나의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의 근무경험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김한정이 노벨상 수상을 성공시키는 데에 은밀하게 도와준 몇 명의 조연을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 하다. 김한정은 노벨상 공작을 수행하는 데 문화 예술 방면의 행사를 기획했다. 대중을 속이는 데는 무엇보다 문화 예술부분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도 그런 차원에서 기획되었다. 판문점에서의 평화음악회를 개최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은 북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잠실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김한정이 기획한 문화예술 공연행사에 단골로 출연한 인사가 있었다. 바로 성악가 조수미씨이다. 아마 김대중의 노벨상 드라마에 여우 조연상이라는 게 있다면 그 상은 마땅히 그녀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 더보기 35. 반역의 드라이앵글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되고 군대와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력이 어느 정도 확고해지자, 김대중은 취임 2년차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목표는 당연히 노벨평화상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1998년 6월, 정주영 회장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그 해 11월에는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합법적으로 김정일의 뒷주머니에 거액의 현금을 넣어 줄 방편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위원회 내에 김대중을 적극 돕는 협조자가 있었다. 바로 스톨셋 부위원장이었다. 그는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기 위해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언질을 계속 보내주고 있었다. 김대중도 “획기적인 돌파구”.. 더보기 34. 김한정이란 사람 나는 김한정과 약 4개월 정도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다.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대충 어깨너머 눈치로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끼리는,“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마. 알면 다쳐!”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섬뜩한 말이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노벨상 공작은 누구도 알려고 해서도 안되고,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나는 김한정과 쉽게 가까워졌다. 서울대 출신은 그와 나밖에 없었다. 내가 국정원 직원답지 않게 운동권의 정서를 잘 이해했던 것도 우리가 가까워 지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의상 서로의 업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틈틈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회사에서 아무런 마찰이 생기기 않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굉장히 열심.. 더보기 33. “알면 다쳐”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노벨상 공작을 직접 추진한 사람은 김한정이었다.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이종찬 원장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비밀리에 여러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외국에도 다녀오기도 하고, 매일 국내의 인사들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조준오가 그의 조수 노릇을 했다. 김한정은 정열적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국정원 내의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랑 부딪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아무도 그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오해를 사기 마련이었다. 그가 기본적으로 기존의 국정원 직원들을 불신하는데다, 비밀스럽게 일을 하다 보니 더 그랬다. 99년 초, 김한정은 햇볕정책을 홍보하는 대규모 국제 세미나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실무를 담당해야.. 더보기 32. ‘외신 대변인’ 대외협력보좌관실에 특채된 인사로 또 다른 김영О 박사가 있었다. 나종일 차장이 그를 특채했다. 김 박사의 선친과 나 차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다, 둘이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김 박사는 런던정경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거쳐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1] 그는 점잖고 신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김영О 박사는 국정원의 외신 대변인 자격으로, 해외 언론을 조정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김 박사의 해외언론 조정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 말이 해외언론 조정 업무이지, 실상은 은밀하게 노벨상 수상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외 언론의 우호적인 논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 임무.. 더보기 31. ‘S 사업’ 또는 ‘N P 프로젝트’ 이종찬 원장은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대중의 노벨상 노욕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김대중으로부터 차기 대권을 이어 받기 위해서는 노벨상을 안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원장이 대외협력보좌관실을 신설한 것은 이러한 나름의 정치적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벨상 업무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종О 대외협력보좌관이 가장 적임자였다. 이 보좌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북구어를 연수한 사람이었다. 노르웨이어와 관련해서는 가장 전문가였다. 그는 동구과장과 동구단장을 거쳤기 때문에 북구 사정은 누구보다도 밝았다. 국정원 내에서 전체적으로 노벨상 업무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었다. 사실, 노벨상 업무는 해외공작국 동구과 북구팀의 오래된 업무였다. 노르웨이와 스.. 더보기 30.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나는 여기저기 옮길 곳을 알아 봤다. 비서실 산하 법률보좌관실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법률보좌관실의 팀장과 간단한 대면 인사를 했다. 결국 그 자리에는 서울법대 출신 다른 친구가 갔다. 그 즈음 원장 비서실 산하에 새로 생긴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곳에서도, “같이 일할 의향이 있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며칠 후 이종О 대외협력보좌관과 면담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1998년 6월, 연수기간 중에 김 대통령의 방미 행사에 차출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협력관은 뉴욕 부총사로 일하면서 뉴욕에서의 경호정보 지원활동을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안면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불러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단도직입으로 전입희망 의사를 밝혔다.나중에 .. 더보기 29 ‘오칠남’ 신세 1998년 6월, 외환위기 여파로 인해 1년 간의 연수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귀국했다. 새로 보직을 받은 부서는 국제정책실 시사정보과(이하 시정과)라는 곳이었다. 원래는, 연수 이전 부서인 해외공작국으로 돌아가야 정상이었지만, 내가 귀국할 즈음엔 해외공작국에는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정권교체 후, 국정원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한바탕 난리를 쳤다. 해외공작국은 조직을 축소하고 인원을 감축했다. 조직이 너무 방대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연수 인원의 보직 문제는 제쳐놓았던 모양이다. 대신 엉겁결에 기구가 대폭 확대된 국제정책실(해외분석 부서)에는 자리가 남아 돌았다. 결과적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다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시정과는 국제정책실을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든 과였다. ..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