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되고 군대와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력이 어느 정도 확고해지자, 김대중은 취임 2년차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목표는 당연히 노벨평화상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1998년 6월, 정주영 회장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그 해 11월에는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합법적으로 김정일의 뒷주머니에 거액의 현금을 넣어 줄 방편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위원회 내에 김대중을 적극 돕는 협조자가 있었다. 바로 스톨셋 부위원장이었다. 그는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기 위해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언질을 계속 보내주고 있었다. 김대중도 “획기적인 돌파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김정일도 김대중의 노벨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노벨위원회의 입장을 충분히 탐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김대중과 김정일 간에 은밀한 거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대중은 김정일에게 천문학적인 뇌물을 제공하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쇼를 성사시켜 나갔다. 현금을 챙긴 김정일은 태연하게 평화 제스쳐를 연기해 줌으로써 출연료에 보답해 주었다.
김대중 정권이 김정일에게 퍼다 준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금과 물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심장을 겨누는 창과 칼이 되어 고스란히 우리 머리 위로 되돌아 왔다. 그 와중에 김정일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에 눈이 멀어 저지른 일들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안보와 평화를 더욱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반역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되어 갔다.
스톨셋 부위원장은 김경태 노르웨이 대사와 여러 차례 만나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전향 장기수의 북한 소환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장기수를 소환하게 되면 인권 대통령으로서의 증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시사했다. 2000년 9월, 신광수를 비롯한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급히 북한으로 송환했다. 노벨상때문이었다.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나 납북자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지난 99년도 8월경, KBS TV가 일요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해 최초로 북한의 장마당 풍경을 방영했다. 이는 북한의 참상을 최초로 카메라에 담은 귀중한 자료였다. 이 비디오는 일본의 렌크(RENK)라는 대북 인권운동 단체가 안철이라는 탈북자를 북한땅에 들여보내 몰래 찍은 필름이었다.[1] 하지만, 사실은 국정원의 대북 심리전 부서가 렌크를 은밀이 후원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나는 북한의 참상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수백 페이지 보고서보다 영상 한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그 비디오를 보고 나서 구토가 났다. 카메라가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메라에 잡힌 내용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일요스페셜이 나간 후, 국정원은 이 자료에 영어 자막을 삽입하여 “북한의 내부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를 만들었다. 세계 각국의 대사관과 현지 공관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정보협력과의 통역요원들이 번역하고 심리전단 요원들이 자료를 완성했다. 하지만, 배포 직전에 청와대에서 이를 금지시켰다.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 비디오는 사장되고 말았다. 최근 나는 내가 보관하고 있던 이 이 비디오를 유투브에 올렸다.
지난 1999년 말에는, 북한을 탈출하여 러시아에 체류 중이던 탈북자 일행 일곱 명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과 러시아가 서로 떠맡기를 거부하는 가운데, 이들은 탁구공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다 결국 북한으로 재송환 된 것이다. 우리 정부마저 뒷짐만 지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들 일행의 탈북 과정도 2000년 초 KBS TV의 일요스페셜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TV와 인터뷰에서, “북한에 돌아가면 우리 전부 죽습네다!”라고 절규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 물에 뛰어드는 북한 처녀의 비참한 실상도 소개되었다. 김대중 정권과 국정원은 이들이 송환된 후에도 끝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얼마나 더 많은 절규가 들려야 들은 척이라도 할런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두 사건은 겪으면서 나는 청와대의 햇볕정책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었고, 더 이상 햇볕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신물이 났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김한정과 연락이 없었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난 후, “사람이 변했다”는 말이 가끔 들렸다. 지난 2000년 7월경 박 선배가 먼저 사표를 쓰고, 나도 뒤따라 10월에 사표를 썼다.
나는 사표 수리를 기다리고 있던 중 퇴근 버스 안에서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결정 소식을 들었다. 그 뉴스를 들으니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겹쳐 왔다. 한편으로는 ‘김한정이 드디어 한 건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김대중의 노욕으로 인해 희생당한 국가이익이 생각났다. 모든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나는 버스 속에서 구역질이 났다.
퇴사하고 한참 후인 2001년 4월 어느 날, 김한정이 난데 없이 집으로 전화해 왔다. 그는, “왜 아무런 상의도 없이 나갔느냐?”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김 선배가 바쁜 것 같아 연락하지 않았다”고 둘러 댔다. 그는, “대통령이 안 계실 때 소주라도 한 잔 하자”고 했다. 나는 “나한테까지 신경 안 써줘도 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는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일하면서 철저하게 익명으로 살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그가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심지어는 청와대에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도 그에 대해 잘 몰랐다.
지난 2003년 1월, 나의 글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난 후 일주일쯤 지나, 김대중은 자신의 퇴임 후 비서관으로 김한정을 임명하였다. 아마 그로서는 퇴임 후 김한정을 자기 품 아래에 두고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서로 운명공동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김한정은 김대중의 입과 손발이 되어 한동안 퇴임 대통령 곁에 머물렀다.
그런데, 지난 2005년 1월말 그는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허급지급 떠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생긴 듯 했다. 아마 검찰의 한화게이트 수사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정형근 의원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김한정이 한화의 돈 심부름을 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 의원은 그 얘기를, “한화 비서실 관계자에게서 들었다”고 했다.RENK는“북한민중 구조 긴급행동 네트워크”(Rescue The North Korean People! Urgent Action Network)의 약자이다.
Youtube.com에서 “북한 꽃제비”또는 “Inside the North Korea”라는 클립 참조. (얼마전 이 동영상은 저작권 문제로 짤렸다. 아마도 국정원에서 유툽에 항의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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