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저기 옮길 곳을 알아 봤다. 비서실 산하 법률보좌관실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법률보좌관실의 팀장과 간단한 대면 인사를 했다. 결국 그 자리에는 서울법대 출신 다른 친구가 갔다. 그 즈음 원장 비서실 산하에 새로 생긴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곳에서도, “같이 일할 의향이 있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며칠 후 이종О 대외협력보좌관과 면담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1998년 6월, 연수기간 중에 김 대통령의 방미 행사에 차출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협력관은 뉴욕 부총사로 일하면서 뉴욕에서의 경호정보 지원활동을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안면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불러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단도직입으로 전입희망 의사를 밝혔다.
나중에 들으니 대외협력보좌관은 몇 달간 은밀히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나를 픽업했다고 했다. 정보학교에서 나에게 영어를 지도했던 신 교수님이 추천해 줬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마 내가 담당해야 할 일이 해외 언론이다 보니 영어에도 어느 정도 능통하고 언론에 대해서도 좀 아는 사람을 고르다 보니 내가 선택된 듯 했다. 나의 전출 인사는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1999년 2월, 나는 대외협력보좌관실로 정식 발령이 났다. 사무실에는 보좌관 아래 팀장 한 분과 파견 나온 과장 한 분 등 총 10여 명의 인원이 먼저 와서 일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국정원 외부에서 특채된 인원도 몇 명 있었다. 아직 고유한 업무가 정착되지 않아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는 조금 어수선했다. 뭔가 엉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원장의 통역을 담당하는 박지О 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재회했다. 나는 그와 정보협력과에서 같이 근무했었다. 그는 켈리포니아주 몬트레이에 있는 통역대학원에서 2년 간의 통역대학원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이 원장의 전속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대외협력보좌관실에 배치된 것이었다.
나는 발령받을 때만 해도 대외협력보좌관실이란 곳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다만, ‘원장 직속의 부서이니, 뭔가 원장의 특명 사항을 수행하겠거니’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이 신설 부서가 무슨 일을 하려는 곳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해가 생기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옥상옥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당시 대외협력보좌관은 이종찬 원장으로부터 주변 강대국의 권력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라”라는 특명을 받고 있었다. 쉽게 말해, 이들 강대국의 권력 핵심 인사에게 접근할 수 있는 로비 채널을 평소에 확보해 두라는 지침이었다. 정보기관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동안 손을 못 대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1] 이 일은 애초에 이종찬 원장의 아이디어였다. 그가 정보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할 대상은 한반도 주변의 4대 강국이었지만, 아무래도 미국이 주요 관심지역이었다. 클린턴가(家)나 고어가, 혹은 부시가와 연이 닿을 수 있는 한인 교포를 파악하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해외 파견관들에게 여러 차례 이에 대한 특별수집요청(SRI)을 지시했다.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가령, 삼성이 텍사스에 투자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부시 가문과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을 수 있을 지 연구했다. 방위산업체인 풍산이나 한화 같이 이미 미국에 끈을 가지고 있는 방산업체를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또한, 코트라(KOTRA)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접근방법도 연구되었다. 이종Ο 대외협력보좌관은 당시 외무부 대사 출신으로 코트라에서 고위 간부로 있었던 남 모씨와 이 일을 자주 논의하곤 했다. 우리는 시니어 부시 대통령이나 탐 리지 펜실바니아 주지사 등 미국의 유력 인사가 방한했을 때,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작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장 성과가 드러나는 사업이 아니었다. 이는 성격상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업이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은 자신의 재임 중에 뭔가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는 업무에 치중하게 마련이다. 이종찬 원장도 가시적인 성과물에 집착했다. 자연히 노벨상 공작에 모든 역량이 집중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안타깝게도 이 원장이 떠나면서 이 일이 중단되었다. 천용택 원장 정도의 머리로는 이런 일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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