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외환위기 여파로 인해 1년 간의 연수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귀국했다. 새로 보직을 받은 부서는 국제정책실 시사정보과(이하 시정과)라는 곳이었다. 원래는, 연수 이전 부서인 해외공작국으로 돌아가야 정상이었지만, 내가 귀국할 즈음엔 해외공작국에는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정권교체 후, 국정원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한바탕 난리를 쳤다. 해외공작국은 조직을 축소하고 인원을 감축했다. 조직이 너무 방대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연수 인원의 보직 문제는 제쳐놓았던 모양이다. 대신 엉겁결에 기구가 대폭 확대된 국제정책실(해외분석 부서)에는 자리가 남아 돌았다. 결과적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다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시정과는 국제정책실을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든 과였다. 과의 요원들은 주로 신입 직원이나 연수 갔다가 복귀한 직원들로 구성되었다. 과의 주요 임무는 한반도 관련한 해외의 공개자료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새로 전입 온 직원들에게 글쓰기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다. 시정과는 매주 번역한 자료를 책자로 만들어 정부 각 부처와 연구소 등에 배포했다. 사실 이 책자는 잘 챙겨보면 꽤 쓸만한 내용이었는데, 아쉽게도 꼼꼼히 챙겨 읽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주로 미국의 언론에 게재된 한반도 관련 칼럼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물론, 『페리』 보고서나 『아미티지』 보고서와 같이 미 정부에서 낸 공식 보고서와 헤리티지 등 일반 연구소에서 발행한 논문도 번역했다. 단순히 번역만 한 게 아니라, 기사를 요약하고 간단한 평가까지 달았다.
이렇게 번역작업을 하다 보니, 미국인들의 한반도에 대한 시각이 대충 눈에 들어 왔다. 미국 언론에 난 한반도 관련 기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도 알게 되었다. 형편 없기는, 타임이나 뉴스위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얄팍하고 표면적인 분석을 담고 있는 기사들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글을 쓴 기자들 중에서 한국어를 제대로 하고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정과 생활은 단조로웠다. 일주일에 기사 두어 쪼가리만 번역하면 끝이었다. 도전할 만한 일도, 창의력을 발휘할 일도 없었다. 야근이나 조출(조기출근)도 없었다. 다른 부서처럼 언제나 휴대전화를 켜놓고, 소위 “통신축 상”에서 움직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국정원 내에서 이렇게 근무 여건이 양호한(?) 곳은 드물었다. 원래 분석 부서란 데가 좀 한가한 곳이기는 하지만, 시정과는 조금 심한 편이었다. 월급 받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다.
당시 국제정책실에는 “오칠남”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 말은, “5국의 7급 남자 직원”이란 말의 준말이었다.[1] 5국은 국제정책실의 또 다른 명칭이었다. 그 말 속에는, “해외정보 분석 부서의 말단 남자 직원은 별볼일 없는 인생이다” 라는 자조가 깊이 배여 있었다. 나도 이런 “책상물림”들과 같이 일하다 보니 별 수 없이 쫌생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터졌다.
번역일에 한창 물이 오르고 있을 때 과장과 계장의 사이가 틀어졌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들 사이에 끼였다. 과장은 신경О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별명이 『신경질』과장이었다. 그의 이름과 그의 성향이 그런 별명을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는 단장 진급에 목을 메고 있었다.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 중요한 실적을 올려야 하는데, 보잘것 없는 번역일이나 감독하고 있었으니 그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계장은 이규О이란 분이었다. 그는 말은 어눌했지만 보고서는 잘 썼다. 내가 쓴 번역 보고서를 다듬어 주는 것을 보면 문제에 접근하는 틀이 잘 잡혀 있었다. 그는 부하 직원인 나를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당시 국정원의 핵심 실세 전주고 출신들과 동문이라 그런지,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도 밝았다. 나에게는 이런저런 회사 돌아가는 얘기를 스스럼 없이 잘해 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직속 상관인 이 계장과 가까워졌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신경질 과장이 이 계장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장에게 직접 화풀이를 하지 못하고, 대신 계원들을 들볶기 시작했다. 괜한 트집을 잡고,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했다. 내 옆 자리에 새로 들어 온 신입 여직원은 과장실에 불려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면 나는 그 후배 여직원을 달래야 했다. 복도에서 후배 여직원을 달래고 있는 내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고 처량해 보였다. ‘오칠남 생활을 청산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해외분석 부서인 국제정책실이 편제상으로 5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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