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재수시절 얘기로 돌아가자. 여름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현듯‘아무래도 대학에는 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그야말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부산으로 내려 갔다. 감만동에 살던 누님 댁에서 우선 여장을 풀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이미 진도도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시험까지는 약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특히 수학은 문제 유형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당시에 안성탕면이 처음 나왔는데, 독서실에서 끊여 먹던 그 라면 맛은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치른 83년 입시에서는 점수가 그런 대로 잘 나왔다. 서울대 법과대학에 응시해서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고대하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대학생활을 얘기하자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하다.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들추어 내는 느낌이다. 나는 처음부터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나 같은 촌놈에게는 대학이라는 곳이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이었다. 젊음이고 낭만이고 뭐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 건 나에게 사치일 뿐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 오려고 그렇게 고생했나 싶었다.
내가 입학한 1984년도에 학원자유화 조치라는 게 시행되었다. 군사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던지 기만적인 유화정책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80년도 초에 녹화사업에 끌려갔던 선배들이 속속 복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1] 이러한 정황이 맞물려 학생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학도 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회가 재조직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도서관 앞 아크로 광장에는 거의 매일 수 천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데모를 했다. 날이면 날마다 캠퍼스 내에 페퍼포그와 지랄탄이 난무했다. 학생회관 주변에는 언제나 대자보가 빽빽이 나 붙었다. 그 시절엔, 복학생협의회 대표이던 유시민 선배가 대자보를 붙이는 날이면 넋을 잃고 쳐다보곤 했다.[2] 그 땐 그가 글을 참 쫄깃하게 잘 썼다.
아마도 87년인가로 기억되는데, 그가 학원폭력 사태로 인해 구속되고 난 후 쓴 항소이유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명문장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운동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어찌 그리 설득력 있게 설명했는지, 읽었던 판사도 감동했다고 한다. 그 때에 비하면, 요즘의 그는 많이 망가진 듯 하다. 언젠가 그가 평상복을 입고 국회에 출현했을 때에는, 마치 흰옷 입은 블랙 코미디언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사회과학 서적을 섭렵하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법과대학에서는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법서라도 끼고 다니면 팔불출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각 서클들마다 수준에 따라 읽어야 하는 필독서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수업에 빠지는 횟수가 점차 늘어 났고, 혼자 이념서적을 탐독하는 시간이 많아 졌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별 재미도 없고, 인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책들이지만, 그 땐 꽤나 진지하게 읽었다. 초기에는 여러 사람이 쓴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시작하여, 이영희 교수가 쓴 『전환 시대의 논리』, 『베트남전쟁사』, 『우상과 이성』 등 여러 책들을 읽었다. 책 표지에 벌거벗은 베트남 여자애가 네이팜 탄을 피해 달아나는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 도 읽었다. “죽음을 넘어… 어쩌고” 하는 황석영 씨가 쓴 광주사태 관련 책도 읽은 것 같다. 당시에는 학생들 사이에 이러한 책들을 읽는 것이 무슨 코스처럼 여겨졌다.
그 즈음 나는 특히나 세계의 혁명사에 깊이 빠졌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러시아 공산 혁명를 거쳐 중국 공산화와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혁명사에 관련된 기록들을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했다. 물론 혁명가들에 대한 전기물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는 물론이고,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그도, 체 게바라, 가타피 등도 읽었다.
한길사에서 펴낸 20권짜리 함석헌 전집도 거의 다 읽었다. 물론 사상계를 통해 이미 함석헌 옹이 쓴 글들을 단편적으로 접한 적이 있지만, 전집으로 읽으니 새롭고 깊은 맛이 있었다. 함석헌 씨의 호쾌하고 자유 분방한 사고에 한동안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사고는 급속히 좌편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른바 흔히 말하는 “골수 좌익”이 됐다.
나는 특히 중국혁명에 빠졌다. 앞서 언급한 홍위병의 영향이 컸다. 중국어를 수강 신청하여 나름대로 꽤 열심히 공부했다. 인민일보를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중국과 관련된 책이라면 모두 구해 읽었다. 당시에는 중국 관련 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청계천을 돌아다니며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야 겨우 관련 서적을 몇 권 건질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 서적에 대한 판금이 풀리면서 중국 관련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이나, 님 웨일즈의 『위대한 길』(The Great Road) 등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읽었다.[3]
님 웨일즈가 쓴 또 다른 책인 『아리랑』은 당시 연안에 있던 김산 - 본명은 장지락이라고 알려져 있음 - 이라는 한국 혁명가의 일대기였는데, 이 책은 80년대 대학가에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도 아리랑을 읽은 후 한동안, “직업적 혁명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덩달아 나의 고향 출신 혁명가였던 약산 김원봉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나는 이른바 “이념서클”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고전연구회라는 서클에는 가입 문턱까지 갔지만, 결국 참여하지는 않았다.[4] 내가 성격이 내성적이었던 탓에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좀 꺼려진 탓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념서클이란 곳에서 선배란 사람들이 뭔가 가르치려 드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이념을 강요 당한다”는 느낌이 싫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더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자칫 잘못 발을 담갔다가는, ‘평생 신세 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나처럼 품성이 괜찮고, 촌놈에다가, 장남이 아닌 저학년 학생들이 이념서클 선배들의 집중적인 모집대상이 된다는 얘기도 돌았다.
하지만, 대안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도 내가 이념서클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게 만든 걸림돌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운동권의 북한에 대한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동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애초부터“위수김동”나 “친지김동’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운동하는 친구들은 대개 품성이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순진한 녀석들이 선배들 따라 껄렁껄렁 데모에 따라 나서더니 어느 날 갑자기 투사가 되고, 열사가 되어 갔다. 얌전하던 녀석들이 어느 날부터 도망 다니더니, 잡혀 가고 끌려 가고, 그렇게 쓰러져 갔다. 그러다 한 명 두 명 소위 현장이란 곳으로 진출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갈라져 갔다.
그들의 치열한 삶에 비해, 나 자신은 비겁하고 나태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되기도 했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뭔가 채무의식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진정한 혁명가는 작은 일에 자신을 쉽게 드러내선 안 된다’며 스스로에게 변명하곤 했다.
학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의 대학생활은 첫 학기부터 엉망으로 망가졌다. 1학년 1학기는 학사경고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성적표가 온통 시들시들(C, D)했다. 하마터면 푸들푸들(F, D)할 뻔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시 학칙으로는, 평균 C 학점 이하이면 학사경고였다. 적어도 비실비실한(B, C) 성적표는 받아야 했는데, 그나마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2학기에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점 격렬해지더니, 집단으로 중간고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시험을 거부하면, 퇴학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두 학기 연속으로 학사경고를 받으면 자동으로 퇴학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1학기 때 경고 받은 사람들은 시험장에 들어가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휴학을 선택했다.
이 때 시작한 휴학으로 인해 그 후 대학생활은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는 복학과 휴학을 반복했다. 내가 휴학계를 제출한 횟수가 무려 여섯 번이나 됐다. 휴학이 아예 전공이 됐다. 그리하여 대학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는 데, 재수시절까지 치면,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나의 대학 시절 얘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서울대 역도부 생활이다. 나는 1학년 가을이 깊어갈 즈음, 마음 붙일 곳을 찾아 역도부실의 문을 두드렸다. 역도부실은 자연대에서 교수회관으로 올라가는, 호젓한 오솔길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관악 캠퍼스 내에서 가장 전망 좋은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배들 말로는, 옛날 관악 캠퍼스가 삼성의 컨트리 클럽이었던 시절에 삼성가에서 화실(畵室)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지난 70년대 초, 서울대가 동숭동에서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했을 때, 역도부 선배들이 “어깨 힘으로” 쟁취한 공간이었다고 했다.
서울대 역도부는 시적이면서도 멋있는 부훈(部訓)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의 가슴 속에 원시적 힘을”이라고 했다. 나는 어쩌면 그 때, 상처 받은 가슴을 채워 줄 뭔가 “원초적인 에너지”를 갈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역도부에 들어간 후, 흔히 말하는 이념 운동권이 아니라, “사전적” 의미의 운동권(?)에 투신했던 셈이다.
서울대 역도부에는 단지 근육을 키우고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하는 것을 벽안시하는 분위기였다. 헬스클럽쯤으로 생각하고 도장을 찾아 오는 사람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 역도부는 글자 그대로 역도를 통해 심신을 수양하는 도장(道場)이었다.
이를테면, 역기를 들어 올릴 때에도“도”를 닦는 마음으로, “고뇌하는” 마음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말 없는 역기를 들어 올리면서 거대한 중력에 저항하는, 자신의 존재와 한계를 깨달으며 역기와 대화를 나누는… 뭐 그런 식이었다.
역도부원 중에서는 역도부실을 양산박 내지는 청학동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그런 조류에 적극 동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게 됐다. 우리들은 만나기만 하면 부실 앞마당에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 가끔은 관악산 개울 건너에 가서 막걸리 파티를 하기도 했고, 신림사거리 순대타운까지 진출할 때도 있었다.
점차 도서관을 향하는 발걸음은 뜸해지고, 역도부실에 죽치는 시간이 늘어났다. 책가방과 멀어지는 만큼 소주병과는 친해져 갔다. 그리하여 소위“술병에서 별이 스러지던” 나날이 이어졌다. 혼돈과 방황의 계절이었다. 늦가을, 역도부실 앞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시던 소주 맛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였다. 땀 흘리고 나서 캠퍼스 구석에 있던 폭포로 몰려가서 자연 상태(?)로 돌아가 목욕하던 기억도 즐겁다. 아마 으슥한 곳을 찾았던 아베크 족들에는 못할 짓(?)이 되었을 것이다.
“녹화사업”이란 전두환 정권이 문제(?) 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킨 정책을 말한다.
물론 대자보는 저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대강 작성자를 알 수 있는 분위기였다.
당시 스노우와 웨일즈는 부부였는데, 1930년대 말 국민당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중국 내륙 깊숙이 연안까지 들어가, 중국 공산당 혁명가들을 만난 후 이 책들을 썼다고 한다. 후에 모택동은 스노우를 “평생의 친구”라며 높이 평가했다.
후에 보니, 고전연구회와 연결되는 “언더”가 주사파의 본거지가 된 모양이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 1. 젏은 날의 기억 '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국정원 입사를 결심하기까지 (7) | 2012.07.16 |
---|---|
4. 미 8군 19지원사 법무감실 (0) | 2012.07.16 |
2. 돌베개와 사상계 (0) | 2012.07.16 |
1. 정보기관과의 첫 만남 (0) | 2012.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