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 젏은 날의 기억 썸네일형 리스트형 5. 국정원 입사를 결심하기까지 내가 정보기관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많은 주저함과 망설임이 있었다. 나도 오랫동안 정보기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보기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도,‘내가 위장취업을 하는 게 아닌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기도 했다. 경찰서에 들락거리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스스로 골수 문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이 나의 적성에 맞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흔히, “20대에 좌익에 빠지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아직 좌익에 빠져 있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20대에 한 때 깊이 좌경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접어 들면서 생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문득 깨달음이 있었는데,“현실 세계를 이념의 틀에 억.. 더보기 4. 미 8군 19지원사 법무감실 그 즈음 나는,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먼저 군대라도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한국군에 들어가면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카투사를 택했다. 나는 85년 말에 카투사 시험에 응시했다. 당시엔, “카시가 국가 5대 고시 중의 하나”라고 느스레를 떨었다. 물론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학력고사 수준이었다.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86년 4월,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학우가 신림사거리에서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엔 대학생들이 전방에 입소하여 일주일간 교련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그들은, “양키의 용병교육을 거부한다”며 온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미군의 용병이 되어 .. 더보기 3. 이념의 바다에 빠지다 다시 재수시절 얘기로 돌아가자. 여름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현듯‘아무래도 대학에는 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그야말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부산으로 내려 갔다. 감만동에 살던 누님 댁에서 우선 여장을 풀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이미 진도도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시험까지는 약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특히 수학은 문제 유형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당시에 안성탕면이 처음 나왔는데, 독서실에서 끊여 먹던 그 라면 맛은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치른 83년 입시에서는 점수가 그런 대.. 더보기 2. 돌베개와 사상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의 청년시절과 대학생활에 대해 좀 소개하고 넘어 갔으면 한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정보기관이란 곳에 몸을 담게 된 동기를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청년시절 얘기부터 좀 하는 게 순서일 듯 하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 뒤돌아 보니, 지난 80년 대 나의 청년시절은 그야말로 폭풍노도의 시기이자 상실과 방황의 나날이었다. 1983년 봄, 나는 부산 서면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 전 해 겨울, 나는 서울대 사회대에 원서를 썼다가 아깝게 낙방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음 속에는 이미 입시 위주의 공부에 대한 회의감만 가득했다. ‘나름대로 하느라고 했는데 대학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라는 자괴감에 빠져, 마음이 많이 상했다. 사회에 대한 원초적인 반항심이 싹텄다. 그 해 .. 더보기 1. 정보기관과의 첫 만남 내가 정보기관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아마 1992년 어느 여름날 오후였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종로 5가 부근 어느 고층 건물의 – 지금은 그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지만 - 맨 꼭대기 층인 13층에 있던 안기부[1]의 물색팀 사무실로 내발로 직접 찾아 갔었다. 언젠가 나보다 먼저 안기부에 입사했던 대학 친구 ○국진이에게서 안기부의 물색팀 사무실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무실은 안기부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회사 바깥에서 운영하는 이른바 안가(안전가옥) 중의 하나 였다. 내가 처음 만난 안기부 직원은 아마 이종○ 선배였던 것 같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발로 찾아 오는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탓인지, 그는 나를 보더니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서울법대생이라고 밝히자 그는 더욱 의..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