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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 젏은 날의 기억

2. 돌베개와 사상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의 청년시절과 대학생활에 대해 좀 소개하고 넘어 갔으면 한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정보기관이란 곳에 몸을 담게 된 동기를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청년시절 얘기부터 좀 하는 게 순서일 듯 하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 뒤돌아 보니, 지난 80년 대 나의 청년시절은 그야말로 폭풍노도의 시기이자 상실과 방황의 나날이었다. 

 1983년 봄, 나는 부산 서면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 전 해 겨울, 나는 서울대 사회대에 원서를 썼다가 아깝게 낙방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음 속에는 이미 입시 위주의 공부에 대한 회의감만 가득했다. ‘나름대로 하느라고 했는데 대학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라는 자괴감에 빠져, 마음이 많이 상했다. 사회에 대한 원초적인 반항심이 싹텄다.

그 해 4월 어느 날,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 바람 쇠러 갔다가, 책을  두 권 샀다. 하나는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인 『돌베개』라는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의 어느 학생이 쓴 『홍위병』이라는 번역서였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접하고 나서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기분이었다. 돌베개를 통해 항일 독립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홍위병을 읽고 나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를 처음 알게 되었다.

돌베개는, 말하자면 장준하 선생의 회고록 같은 것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장 선생이, 야곱이 베고 잔 돌베개에서 그런 제목을 따온 모양이었다. 그 책에서 그는 일제 말 강제 징집 되었다가, 일본군대를 탈출하여 독립군을 찾아 나선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게다가 그는 당시 독립군의 이념적인 분열상과 처참한 실상과 관해서도 가감 없이 썼다.   

5월 초순, 나는 학원을 그만두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갔다. 학원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박영돈 선생은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 강사이자 나와는 동향이었다. 그는 하도 강의를 많이 한 탓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쇠소리가 묻어 났다. 그는 나에게,“니가 대학에 들어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며 폭언을 하면서, 나의 시골행을 한사코 만류했다. 아마 동향의 후배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판단하고 진정 어린 충고를 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장을 지지던 볶던 간에 두고 보면 알 일이고우선은 갑갑한 재수생활에서 벗어 나고 싶었다.

여름 내내 농사일을 도우며 시골 집에서 지냈다. 보리타작과 모내기도 하고, 때로는 땡볕 아래에서 농약 치는 것도 거들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러다가 낙오자가 될런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향이 주는 푸근함 속에서 잠시 안락함을 만끽했다. 여름밤 강둑에 올라 풀벌레 소리와 밤하늘의 별들의 황홀한 향연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 시골집 사랑방 서가에는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정기 구독하여 보시던 사상계[1]가 보관되어 있었다. 창간 직후부터 60년대 말까지 백여 권의 잡지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어떤 책은 너무 많이 읽어서 누렇게 변한 표지가 너덜거리는 것도 있었다. 어떤 책은 읽은 횟수를 표시한 것인지 기사 머리마다 빨간 인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놓은 것도 있었다. 기사 가운데는 동그라미가 예닐곱 개나 그려져 있는 것도 더러 있었다.

큰아버지는 어릴 때 돌팔이 의사에게 허리에 침을 잘못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셨다. 흔히 말하는, “누운뱅이였다. 우리 어머니의 전언에 의하면, 그래도 그는 시골에서는 꽤 유식한 사람으로 통했다고 한다. 동네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해결사(?)로 활약하곤 했다고 한다. 한평생 사상계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았으니, 아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금새 사상계에 심취하게 되었다. 대학 입시준비에 정나미가 떨어진 재수생에게는 더 없이 좋은 소일거리였다. 사상계에는 한국 논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함석헌 선생의 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읽을 거리가 많았다. 당시로서는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을 소개하는 글들도 좋았고, 전후 리얼리즘 소설을 읽는 맛은 더욱 짜릿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우연히 사상계가 꽂혀있던 서가 한 켠에서 누렇게 변색된 옛날 신문뭉치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1960 4월혁명 전후의 동아일보였다. 아마도 큰아버지가 사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소중히 보관했던 모양이었다. 신문 곳곳에 검열로 시커멓게 잘려 나간 백지 기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신문 뭉치에서 4월 혁명의 피냄새가 났다. 방황하던 재수생의 눈에는 불이 튀는, 적나라한 내용이었다.

나는 특히 이 신문뭉치와 함께 1960 6월에 발행된, 사상계의 4월 혁명 특집호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책에는 서울 법대 강사라고 소개된 김치선이란 분이 쓴, ‘아우의 주검 앞에서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다. 그 글은 4.19 의거 때 경찰의 총격에 숨진 아우를 기억하며 쓴 글이었다. 나는 서울대에 들어가서 김치선이란 분을 만나보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서울 법대에 들어가서 보니, 김치선 교수님은 법과대학 학장이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갓 들어온 얼치기 운동권 학생이었는데, 그 분은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학생들의 데모를 적극 만류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도 나는 서울대 재학 중에, 관악 캠퍼스 안쪽 구석에 있던 4.19 기념공원에 들러 그 아우의 기념비를 참배하곤 했다.

 이렇게 나의 청년시절은 사상계로 시작하여 사상계로 끝났다. 재수 시절에 사상계에 의해 뿌려진 이념적 방황의 씨앗은 그 후 대학시절에 줄곧 영향을 미쳤다. 사상계는 나의 이념의 교사이자 나침반이었던 셈이다. 그 시절 동안 나는 사상계를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아예 시골집의 사상계를 통째로 서울로 가지고 올라 갔다.

사상계 원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언제나 마음이 뿌듯했다. 언젠가 80년대 말 즈음에 사상계 영인본이 출간되었을 때에는, 원본 소유자로서의 기분이 한껏 고양되기도 했다. 가끔 청계천에 들러 내가 소지하고 있지 않은 사상계 결본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을 때도 있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이념의 과잉이 빚어낸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일백 권이 넘는 잡지를 보관하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자취생 주제에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은 데다, 퀴퀴한 책 냄새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특히 이사 다닐 때마다 애물단지가 됐다. 대학생활이 끝나갈 즈음,‘이념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싹터면서 사상계와 작별하게 되었다.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던 시절이었다. 

내가 봉천동 국사봉 꼭대기에 살던 90년대 초, 나는 집 옆의 공터로 사상계를 모두 가지고 나가 불태웠다. 이를테면, “이념의 화형식을 거행한 셈이었다. 불타는 책을 보면서이제 이념과는 결별이다고 다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사상계를 없앤 게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 잡지는 큰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우리 집의 가보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사상계는 장준하 선생이 6.25 전쟁 통에 부산에서 창간하여 손수 리어카를 끌고 배달하면서 일군 잡지로, 전후 한국의 지성과 저항을 대표하는 잡지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사상계를 읽지 않으면 지성인으로 대접받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사상계는 지난 1970, 김지하의 문제작 『오적』을 게재한 후 강제 폐간되었고, 몇 년 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선생도 포천 약수봉을 등반하던 중에 실족하여 추락사했다. 장 선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사라며 타살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