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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0. 국정원을 퇴사하고서

51. “내보다 더 마이 아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 왔다. 나는 내가 준 정보를 이병기 특보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청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중전화로 이 특보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직접 한 번 들어갈까요?”하고 물었다. 그는 선뜻들어 오라고 했다. 대선을 3주 정도 남긴 2002 11 28, 나는 급히 비행기표를 끊어 서울로 향했다. 그 때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나는 학점 같은 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한나라당 당사를 찾았다. 도착해 보니 마침 그 날이 한나라당이 1차 도청자료를 폭로하는 날이었다. 한나라당 특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나라당의 젊은 보좌관들이 저희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그들은,“우리들은 너무 신사적이다. 민주당 놈들이 이런 자료를 입수했더라면 생난리를 쳤을 텐데…”라며 뭔가를 놓고 저희들끼리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김치국에 취한 듯이 보였다.

나는 궁금하여 어깨 너머로 건너다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것은 메모보고서였다. 워드로 다시 찍은 것이지만, 형식과 내용으로 보아 한 눈에 메모보고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건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1년간 밤낮으로 다루었던 문건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저 문건이 어떻게 한나라당까지 흘러 들어올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특보에게내가 건낸 자료를 어떻게 처리했는지?”고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아직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특보라는 사람이 그 귀중한 정보를 얻고도 자신의 책상서랍 속에 쳐박아 두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니그게 한나라당의 현실인식이고, 그게 한나라당의 한계였다.

그 날 오후, 나는 이병기 특보와 정형근 의원 앞에서 다시 한 번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비밀 대북 뒷거래, 그리고 임동원의 간첩혐의 등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그리고, “북한으로 송금된 돈이 실제로는 15억 달러에 이른다는 얘기도 전했다. 정형근 의원은 도청자료 공개를 준비하느라 전날 잠을 못 잔 탓인지, 꾸벅꾸벅 졸면서 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브리핑을 마치자 정형근 의원은, “니는 우째 지난 일들을 날짜도 안 잊어 먹고 다 기억하고 있노? 내보다 더 마이(많이) 아네!”라며 감탄사를 발했다. 당시엔 김한정이란 인물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내가 김한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그는 많이 놀라는 듯 했다. 그는 옆에 있던 이병기 특보에게, “김한정이 고기(그것이) 야시(여우)인 거라. 한화 돈심부름도 그 놈이 다 했다카이!”라고 말했다.

나는 브리핑을 마친 후, 한나라당이 나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줄 수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나는, “신변 안전만 보장되면 노벨상 공작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며칠간 말미를 달라고 했다. 한나라당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충청도 공주, 부여 지방과 전라도 고창의 선운사 등지를 여행하며 며칠을 보냈다. 고향에 잠시 들러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친구들을 잠깐 만나기도 했다. 

처음부터 서울에 오래 체류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지체하다 보면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국정원에 알려지고, 종국에는 김한정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극도로 로키(lowkey)로 움직였다. 전화도 공중전화만 사용했다. 혹시 추적당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시내의 찜질방을 전전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낮에는 만화방에서 시간을 죽였다. 이 때 『열혈강호』라는 무협만화를 재미 있게 읽었다. 신세대들의 발랄한 감수성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국정원의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지만, 들어온 게 소문이 날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극소수의 친구 몇몇만 만났다. 훈육관에게는 전화하여 안부만 묻고 입국한 목적 같은 것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급한 데 쓰라며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해 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 즈음 아는 동생에게 미국에서 들어온 이유를 말했더니, 그는 지나가는 말로 한국판 『드레퓌시』 사건이 되겠군이라고 중얼거렸다.<!--[if !supportFootnotes]-->[1]<!--[endif]--> 그의 언급은 나의 양심이 겪게 될 고난의 세월을 예고한 것이었다.

내가 드레퓌시에 비견될 만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나에게는 에밀 졸라 같은 사람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에서 양심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검은 제복을 입은 성직자들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수 양심을 외치는 이들도 왠일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양심이 마비되기는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민주도 한나라도, 그저 피차일반인가 보다. 대한민국은 진리가 말라죽은 절망의 땅으로 보였다. 

대통령 선거가 열흘 전으로 다가왔는데도 한나라당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다시 이병기 특보를 찾아갔다. 내가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었더니, 그 사이 그의 태도는 변해 있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던지 무얼 하던지 한나라당은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두 차례에 걸쳐 도청자료를 공개했지만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국정원의 불법 도청을 부각시키고, 노무현 후보와 청와대간의 유착관계를 알리려는 전략이었는데, 그게 잘 먹히지 않았다. 선거 목전의 네거티브 전략은 득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났다. 아마도 한나라당은 노벨상 공작을 폭로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별반 효과가 없으리라고 판단한 듯 했다. 이 특보를 비롯한 한나라 인사들은 자신들이 연루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비겁한 사람들이었다.

그 즈음 나는 신변이 걱정이 되어 한나라당 특보실에 있던 젊은 보좌관에게 나의 가방을 좀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나의 부탁을 들은 그는 냉정하게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이런저런 일로 한나라당에게 심한 배신감만 느꼈다. 그래도, 멀리서 시간과 경비를 써가며, 위험을 감수하고 온 사람에게 한나라당은 기본적인 예의마저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동아일보로 찾아갔다. 싸늘한 겨울 바람을 맞으며, 동아일보 사옥 꼭대기에 있는 사장실에 찾아갔다. 나는 여비서에게, “김학준 사장이나 김병관 회장을 좀 만나고 싶다고 했다. 여비서는회장님은 출근하시지 않으시고, 사장님은 지금 자리에 없다고 했다. 나는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 즉시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를 탈 때 혹시 국정원 수사관들과 조우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무사하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의 창에 기대어 서울하늘을 내려다 보면서, ‘한나라당이 선거에 지려고 아주 발버둥을 치는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이병기 특보 같은 머저리들을 보좌관이랍시고 데리고 있는 이회창 후보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멍청한 짓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으로 되돌아오는 비행기가 느리게만 느껴졌다.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 국내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지인들은 내가,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국내에 들어 왔다는 사실과, 한나라당 당사에 출입했던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 되었다고 했다. 내가 알던 친구들이 부서 행정과에 불려가, “김기삼이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지 등에 관해 취조를 당하고, 구두 경고를 받았다고도 했다.

내가 노벨살 공작에 관한 글을 발표한 후에는 한국일보의 모 기자는, “김한정이가 국정원 감찰실에 직접 지시해, “무조건 김기삼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알려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감찰실에서 체포조를 풀었을 때는 김기삼은 이미 공항을 빠져나간 후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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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시 사건이란 1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인데, 드레퓌시 대위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가, 수년간의 투쟁 끝에 가까스로 풀려났다. 당시 에밀 졸라를 비롯한 프랑스의 지성들이 드레퓌시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양심의 승리를 말할 때 흔히 인용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