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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10. 국정원을 퇴사하고서

46. ‘김대중의 심장에 비수를…’

2000 10 28, 나는 7 10개월간 몸 담았던 국정원을 떠났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막연히 '잘되겠지'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이 겪은 정치적인 고난의 의미를 잘 되새겨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완성하고, 고질적인 지역감정 문제도 극복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나의 그런 바램이 순진한 희망으로 판명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분노로 변해 갔다. 나는 깊은 회의와 좌절감에서 빠져 들었다. 갑갑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사표를 생각하게 됐다. 

국정원은 이직률이 매우 낮은 직장이다. 일반 사회의 직장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다른 정부 부처 공무원들과 비교해도 국정원의 이직률은 가장 낮은 편이다. 이유 없이 사표를 쓴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던 직원이, 그것도 앞날이 창창한 젊은 직원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둔다니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더군다나 국정원에서는 사표를 쓰고 떠나는 동료에 대해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아마도 은연 중에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게 있어서 그럴 것이다. 나의 등 뒤에도 서울대 출신은 할 수 없어!”라는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개인 사정으로 사직하는 직원 중에서 비교적 서울대 출신이 많기는 할 것이다. 나는 주위에다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퇴사한다고 둘러 댈 수 밖에 없었다. 사표를 제출하고, 늦가을에 물든 청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무작정 퇴사를 결심했지만, 아직은뭐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일말의 자신감은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회사 내 친구들은 나의 퇴사를 걱정해 주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어 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들은, “매달 얼마씩 십시일반으로 도울 테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눈물겨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그 카드는 책상 속에 처박아 두고 한번도 쓰지는 않았다. 

퇴사 후 집에서 얼마간 쉬면서 지나간 날들을 회상해 보았다. 문득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젊은 날을 온전히 다 바친 국정원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김대중 정권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국정원 직원이라는 족쇄를 풀었으니,‘나 혼자서라도 김대중 정권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비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먼저 임동원의 간첩혐의를 추적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나는 국정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임동원의 행적에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무엇에 쫓기는 듯, 병적으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최측근 보좌관에게까지 자신의 속내를 잘 털어 놓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나는 그러한 그의 태도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퇴사하기 직전, 동료로부터 박지원의 워커힐 호텔에서 난동 이야기를 들은 후에 그에 대한 의심은 더욱 굳어졌다.

나는 국정원 내의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임동원에 대한 혐의 사실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나는 당시 강남에 있는 미국 변호사 시험준비 학원에 다녔는데, 공부보다는 임동원을 추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단편적인 첩보는 입수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결정적인 단서는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공개자료를 뒤지며 지난날 국정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들추어 보기로 했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



박지원의 워커힐 난동 사건은, 1부 양심선언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