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를 손에 쥔 김정일이 “일주일 거리”도 안되는 대한민국을 접수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이 위대한 영도자의 결행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가? 단언하건데, 그것은 대한민국 국군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자존심 상하는 얘기이지만, 그것은 주한미군의 덕택이다. 김정일은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미군이 개입하게 되면 결국 자신이 자멸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보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미동맹이 최근 20년 동안 심각하게 훼손되어 왔다.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이라크 파병문제와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 그리고 전시 작전권 이양 문제 등에 관해 논란이 계속되면서 한미동맹의 파탄이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차제에 한미동맹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지난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에는 동맹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기막힌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청와대는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양 행동했지만, 양국 간에는 마치 거대한 얼음장이 중간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잠시 되돌아 보겠다.
2002년 대선 선거기간 중 노무현 후보는, “반미면 어떠냐? 남북 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다 깽판쳐도 괜찮다”며 도발적인 언급을 했다. 그는 또한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진 않겠다”고도 했다. 그의 측근 중의 한 명은 공개적으로 미국에다, “한국의 대선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또한,“미국과 의견이 다른 것은 달라야 한다”며 반미를 선거전략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물론 의도적으로 미국을 자극하기 위한 일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 후, 계룡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주한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자주국방이 가능한지를 분석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자주」라는 그럴듯한 말로 「반미」라는 말을 교묘하게 위장했다. 정권 내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끊임 없이 계속하곤 했다.
이러한 한국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CBS의 간판 시사프로그램 「60분」은 한국 데모대가 성조기를 찢고 불태우는 장면과 주한 미군 장성이 한국의 반미 정서에 대해 눈물 흘리는 장면을 여과없이 방영했다. 우리가 미처 느끼기도 전에 미국의 여론 지도층 사이에서는 한국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즈음 백악관 주변에서는 청와대의 젊은 측근들을 가리켜 “탈레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 주가가 급락하고 경제가 흔들리면서 무디스가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부랴부랴 방미 대표단을 파견했다. 지난 2004년 5월 방미시에는 “50년 전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정치범 수용소에 가 있을런지 모른다”며 마음에도 없는 아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무리하게 통역을 따돌린 가운데, 영어로 직접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이 북한과 불가침조약 (Non-aggression Pact)을 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말을 들은 부시 대통령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이없는 표정만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노무현 정권은 6자회담 과정에서도 우방들과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끝없이 김정일의 눈치만 살폈다. 당연히 미국과는 아무런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지난 2003년 10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방미하였을 때 조지타운대의 빅터 차 교수는 “한미 관계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언급하였다. 사실 한미 관계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워싱턴 주변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현실이었다. 그 정도의 우회적 표현은 아주 점잖은 축에 속한 것이었다. 부시 정부는 이례적으로 이미 “깽판”이 되어버린 한미 관계의 현실을 언론에다 우회적으로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그 때 방문단의 일원으로 온 정형근 의원을 워싱턴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워싱턴에 오기 전에는 한미 동맹 관계가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토로했다. 나는 그에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외교적 수사(修辭) 뒤에 가려진 진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참혹합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한미 간의 골이 더욱 깊어 지게 된 이유는,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와 이라크 파병문제, 그리고 전시작전권 이양문제 등이 연이어서 터졌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런 문제를 통하여 우리의 동맹의 의지를 시험하려 했다.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통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 졌다. 이라크 파병도 “할려면 하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고압적으로 통보해 왔다. 미국은 노무현 정권이 전시작전권 이양문제를 제기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양의 의사를 표명했다. 마치 “말만하면 언제든 군대를 빼겠다”는 식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라크 파병문제를 협의할 때 청와대는 백악관에다“오천이 아니라, 오만이라도 보낼 수 있다”고 회신했다고 한다. 대신 노 정권은 두가지 파병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Preemptive Strike)을 포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백악관은 또 한번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겉으로는,“동맹국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젊잖게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분개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노 정권 내내 한미연합사는 완전히 겉돌았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을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니라, 도망가고 있는(Run away) 동맹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던 때도 있었다. 실제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나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는 한국측 파트너들에게 대놓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언급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에는 의미있는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측은 내내 등을 돌리고 지냈다. 정권 초기, 나종일, 권진호 안보보좌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몇 차례 워싱턴을 다녀갔다. 이종석 NSC 차장과 박선원 비서관이 다녀 가기도 했다. 그들은 워싱턴에서 마치 「소 닭보듯」하는 대우를 받았거나, 아예 「찬밥」 취급을 당했다.
이종석은 언젠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나는 「자주파」가 아니라, 「상식파」”라고 말해 사람들을 웃겼다. 당시 모 신문은, “이종석이 라이스, 아미티지, 월포위츠를 만났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정확한 기사가 아니었다. 사실은, “자신의 파트너인 해들리나 그린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겨우 스트로브 국무부 한국과장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머쓱했던지 특파원 간담회에서, “한미관계가 좋아 풀 오해도 없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이종석이라는 사람은 김대중 정권에서 임동원 밑에서 햇볕정책의 꼬마 전도사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시절 안보보좌관을 지낸 리차드 알렌은 어느 일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고위인사 가운데 우리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인사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 고관이 다름 아닌 이종석 씨였다. 황장엽 선생은 그를 가리켜,“서울에는 천재가 너무 많다. 그들이 내뿜는 젖내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미동맹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게 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줄기찬 노력의 결과였다. 미국 조야 사정에 밝은 유명환 장관이 이 같은 일에 어느 정도 많은 기여를 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지난 10년간 좌파 정권의 휴유증을 모두 다 치료하지는 못한 모습이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한반도를 위해 자국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는 일을 원치 않는다.
그러면 이렇게 철저하게 한미동맹이 망가지게 된 이유는 뭔가? 물론 우리의 일방적인 잘못 때문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양측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둘 다에게 원인이 있다. 하지만, 둘 중에서 원인을 더 많이 제공한 당사자가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눈으로 보면 그동안 미국은 분명 “저만 아는 거인”처럼 행동해 왔다. 미국의 일부 인사들은 아직도 우리가 50년 전 대한민국인 걸로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미관계가 금이가게 된 것은, 한국 지도층의 오만과 기만, 그리고 부정과 부패에 연유한 바가 컸다. 대통령의 자질이 안되는 자가 오만방자한 외교정책을 펴면서 동맹에 금이 갔다. 사기꾼 같은 대통령이 동맹국을 배신하면서 동맹을 파탄냈다. 게다가 부패한 대통령들이 안보를 갖고 장난을 치면서 우방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김영삼 정권에 시작되어 김대중 정권에 걸쳐 이루어졌다.
사실, 한미 동맹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단초는 이미 노태우 정권 때부터 나타났다. 박철언이 주도한 북방정책은 미국과 아무런 사전 협의가 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공산권에 대한 맹목적인 호의는 동맹국 미국의 불신을 자초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소련에 대한 30억불의 현금차관 문제가 미국의 심사를 크게 자극했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소련으로 들어가는 경화를 차단하여 소련을 고사시키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에 재를 뿌렸다. 미국은 박철언 씨를 워싱턴으로 불러 이에 보복했다.
김영삼 정권 시절의 외교정책과 대북정책은 일관성과 철학의 결여로 요약할 수 있다. 많은 부분은 그의 무지와 무능에 책임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동족(同族)은 우방에 앞선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물론 이는 김일성을 흥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냉소를 샀다. 이후 그는 좌충우돌 대외정책과 우왕좌왕 대북정책으로 동맹국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는 줄곧 우방국에 대해 가르치려 들거나“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한미 동맹관계가 결정적으로 깨어지게 된 계기는, 김영삼 정권 말기와 김대중 정권 초기에 있었던 몇 가지 무기도입 비리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 정부가 미국의 스팅어를 거부하고 프랑스로부터 미스트랄(Mistral)이라는 대공 유도 미사일을 도입한 사건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하게 썼으니 여기서는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다.
한편, 1996. 9월 26일, 미국의 해군정보부에 근무하던 로버트 김이라는 사람이 미 FBI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강릉에서 발견된 북 잠수함의 침투 경로를 주미 대한민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던 백동일 대령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이후 이 사건은 김영삼 정권의 한미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미국 정부가 로버트 김을 체포하자 권영해의 안기부는 도날드 레드클리프라는 미국인을 간첩혐의로 체포했다.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한미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김영삼 정권의 의도적인 대미 대립각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가는 혹독했다. 그의 임기 말 우리나라는 외환위기에 빠졌다. 외환관리의 실패로 인해 국가부도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이 절실한 때에 우방국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우리 정부에게 클린턴 행정부는 차갑게 어깨를 돌렸다. 우리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의 한미관계는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 주된 이유는 햇볕정책과 대북송금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김정일과 뒷거래하면서 동맹국을 속이고 주적과 내통했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이러한 김대중의 행각을 모른척하면서도 속속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김대중 정권은 “미국에게 남북대화의 숨소리까지 전해주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속이려고만 들었다. 이 모든 일이 노벨상 때문에 벌어졌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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