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름대로 대한민국에 관해 좀 안다고 생각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청년기 이후 우리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했다고 자부해 왔다. 앞에서도 좀 설명했지만, 국정원에 근무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고, 더 다양한 체험을 했다. 지난 몇 년간 적어도 미 대륙에서는 나보다 한반도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요즘 내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아직도 내가 대한민국을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가 많다.
지구 반대편에서 바라 보는 한반도 남쪽 부분은 태평성대 그 자체다. 지금 우리는 분명 단군이래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회 전체가 역동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은 보다 친절해 졌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곳곳에 아파트가 새로 들어 서고, 새 고속도로가 생겨나고 있다. 물질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자신감이 넘친다.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여러모로 월등히 나아 보인다.
하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사회 곳곳에서 불길한 징조가 보인다. 사회 기강은 해이해 졌고, 도덕은 문란해 졌다. 모두가 방관자로 돌아 앉은 모습이다. 사회의 각 분야에 도덕적 해이가 번져나고 있는 것을 본다. 무엇보다 걱정스런 현상은 국가 공동체 의식이 점차 느슨해 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그저 자기가 잘나서 잘먹고 잘사는 줄 안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이 누구 덕택에 가능했는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더욱 혼란스런 풍경을 대하게 된다. 이념으로 나뉘고, 계급으로 찢기고, 지역으로 쪼개지고, 세대간에 막히고, 종교간에 갈라진, 그야말로 만신창이의 모습이 드러난다. 경제 개발의 그늘에서 소외된 계층은 불만 세력, 체제부정 세력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2-30년 동안 자생적인 공산주의자와 맹목적인 종북주의자가 위험한 수준까지 증가되었다. 이제 우리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의 비율이 30%에 육박한 것 같다. 지역간 간의 화합은 아예 물건너 간 형국이다. 이제는 더 이상 국민통합에 대해 논의조차 없다. 아예 체념 상태다.
생각이 안보현실에 미치면 사정은 훨씬 더 심각해 진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휴전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산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편하게 잊고 산다. 번영은 그저 굴러 들어오는 것이고, 안보는 그저 주어지는 것으로 믿는다. 우리 발 아래 북한의 특수군이 침투할 수 있는 땅굴이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는 아예 눈감고 있다. 우리 머리 위로 북한의 장사정 포가 곧바로 날아 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한다. 이제는 김정일이 만든 원자폭탄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태연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우리나라의 안보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괴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극단적인 호전세력과 휴전상태를 지속해 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안보가 보장되어 왔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기적처럼 평화가 유지되어 왔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러한 일들은 그야말로 불가사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노라면, 안보의식이란 것이 결여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깡그리 실종되고 없다. 어쩌다 우리의 안보를 우려하는 척이라도 하면 당장 냉전주의자로 매도된다. 애국을 말하면 금새 팔불출로 취급된다. 전쟁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먼나라 이야기다. 통일이고 뭐고 다 귀찮고, 나와 내 가족만 무사하면 그만이다라는 소아병적인 이기심이 온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 모두가 무임승차자들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군대는 빠지는 게 최고인 게 되버렸다. 한심한 일이다.
우리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좌파가 다수를 점했다. 종교계, 문화계, 언론계 등 어디나 마찬가지다. 교육현장에서는 전교조가 의식화된 청소년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는 민주노총이 극단적인 쟁의를 주도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가 “세계 노동 운동의 메카”가 되었다. 선진국 노조들이 우리에게 배우러 온다. 그들은 우리의 노조전임자 제도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요즈음은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법조계에까지 좌파가 침투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에 좌파에 오염되지 않은 영역이 없는 것 같다.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간당간당한 느낌이다.
지난 10여년 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가장 특기할만한 일은 촛불 세력의 등장이다. 이들은 미군 장갑차의 단순한 과실치사 사고를 양키 군대의 고의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둔갑시켰다. 이들은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때에는 정권을 방어하는 홍위병이 되었다. 광우병 소동에서는 멀쩡한 미국산 소고기를 청산가리보다도 더욱 위험한 물건으로 탈바꿈시켰다. 유모차 돌격대를 앞세우고 이른바 명박산성을 타고 넘어 돌진해 나갔다. 이들은 걸핏하면 광화문 네거리를 해방구로 점령한다. 이들에게는 논리도 이성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대체 이들의 광기는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지난 10여년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또다른 특기할만한 경향은 조직 간첩사건에 관한 뉴스가 사라진 일이다. 물론 일심회 사건 같은 피라미 간첩사건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규모 지하당 조직 사건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김정일이 개과천선하여 남조선 혁명전략을 포기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떻게 된 일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대공여건이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은 이미 발톱 빠진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 사회는 온통 간첩들의 온상이 되었고, 천국으로 변했다. 우글거리지만 잡지 못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최후의 조직 간첩사건이었던 민혁당 사건이 발표된 지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우리 정보당국은 여수 앞바다로 침투한 북한의 반잠수정의 통신을 완벽하게 감청하고 있었다. 우리 군은 그 배를 포위하고 생포작전을 펼쳤으나, 이들이 저항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침몰시켰다. 가라앉은 잠수정을 인양하자 간첩의 접선자 명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간첩들이 먹고 버린 봉천동 어느 빵집의 빵포장지까지 건져 올렸다. 이들을 접선하려고 호남 고속도로를 달렸던 간첩 일행의 자동차 번호판도 촬영하였다. 이들의 대북 이메일 교신도 포착해 냈다. 완벽한 수사였다. 하지만, 이들 간첩들은 그 후 재판과정에서 모든 일을 철저히 부인으로 일관했다.
민혁당 사건이 일어나기 조금 전에는, 울산에서 부부간첩단 사건이 있었다. 지난 1997년 10월, 안기부는 최정남과 강연정이라는 부부간첩을 체포했다. 체포 직후 강연정은 자살했다. 그녀는 안기부 여 수사관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화장실에서 독약 엠플을 삼켰다. 그녀는 독약 엠플을 자신의 몸 속 은밀한 곳에 감추고 있었다. 내가 수사국 친구에게 듣기로는, 그녀는 음모를 꼬아서 독약 엠플을 몸속에 고정시켰다고 한다. 나는 인체 구조상 그런 일이 도데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당시 이들 부부간첩이 체포된 과정은 한동안 안주거리가 됐다. 당초 이들은 울산 지역의 노동계에 직접 침투하기 위해 남파되었다. 이들은 전국연합 간부 정 모 씨에게 접근하여, “조국통일 사업을 위해 북한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마침 대선 직전 민감한 시기였던터라, 이 종북 노동운동가는 정보기관이 자신을 공안사건에 엮으려는 줄로 지레 짐작하고 이들을 당국에 신고했다. 신고를 접한 안기부와 경찰은 잠복 끝에 이 이상한 간첩단을 체포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코미디였다.
사실은 지난 1995년 10월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부여 간첩 김동식 사건’이었다. 당시 간첩 김동식은 남파된 후 대담하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허인회, 이인영, 함운경 등 80년대 학생 운동 지도부에게 접근했다. 허인회는 그 후 김동식과의 회합을 끝내 부인했다. 이렇게 남파 간첩과 접촉한 자들은 북한이 제공하는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을 무상 출입했다. 앞서 말한 민혁당의 주도자였던 김영환 씨도 지난 1991년, 강화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두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예는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안보여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은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벌어진 송두율 사건이 아니었던가 싶다. 지난 2003년 11월, 독일에 체류 중이던 송두율이 귀국하였다. 그는 그 전에도 수차례 귀국을 시도했으나 보안기관의 조사문제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아마 그의 추종자들의 권유 내지 강권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국정원의 내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국정원은 그에 대해 이미 20여 년 간의 내사 자료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국정원이 송두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그가 1970년대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소위‘민건’)라는 조직의 회장이 되면서부터였다. 지난 1980년 초, 남쪽으로 망명해 온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김정일이 구주위원회 회장인 송두율을 아낀다”는 진술을 했다. 이때부터 안기부는 본격적으로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4년 김일성 사망시 김철수라는 인물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장례위원회에 서열 23위로 등재되었다. 그 전에는 김일성이 김철수라고 소개된 송두율을 접견하는 사진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부터 안기부의 수사국과 해외공작국은 송두율의 행적을 더욱 면밀히 추적했다.
지난 1998년 12월, 황장엽 선생이 『북한의 진실과 허위』이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그 책자에서 황 선생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송두율이다”고 밝히면서, 송두율에게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조언했다.[1] 이에 대해 송두율은 한국 법정에서 황 선생을 명예훼손 혐의로 제소했다. 그러자 한겨레를 비롯한 여러 좌파 언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송두율을 비호하고 나섰다. 당시 안기부는 송두율이 김철수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그에 대한 비밀증거들을 법정에 제출하지 않았다. 소송은 부분적으로 송두율의 승리로 끝났다.
국정원이 송두율이 북한의 거물간첩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1998년 경 국정원 해외공작국 독일거점이 진행한, 기발한 공작의 성과물이었다. 국정원의 독일거점은 공작이라는 기망수단을 동원하여 송두율의 담당하고 있던 북한이익대표부 내 김경필 서기관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입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공작을 담당한 직원은 베를린에 파견된 국정원 해외공작국 서구과 H 모 공작관이었다. 공작을 완수하고 난 후, 그는 신변안전을 우려하여 이름까지 바꿨다. 그 후 그가 실행한 공작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일부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2]
당시 H 공작관은 유럽 범민련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던 최 모 씨를 포섭했다. 물론 H 공작관은 최 씨가 김경필과 각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H 공작관은 최 씨를 통하여 김경필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입수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H 씨는 최 씨로 하여금 김경필에게 하소연하여 김경필의 컴퓨터를 잠시 빌려 쓸 수 있도록 공작했다. 김경필은 의심 없이 자신의 컴퓨터 기록을 삭제하고 컴퓨터를 최 씨에게 건네 주었다. 김경필은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가 자동적으로 백업파일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점이 이 기발한 공작의 핵심 노림수였다. 국정원은 김경필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복구하여 손쉽게 그의 전문 원본을 손에 넣었다.
국정원이 복구한 김경필의 파일에는 북한 정보기관이 송두율에게 지령한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 파일에 의하면, 지난 1997년 2월, 황장엽 선생이 중국에서 망명을 선언하자, 송두율은 김경필에게, “황장엽이 내가 노동당 지도기관 성원임을 아는가?”라고 문의했다. 그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김경필은 이를 평양에 보고했다. 평양 당국은, “조국에서는 황 가가 당신이 당중앙 지도기관 성원임을 모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모략선전으로 강하게 반박하라”라는 지침을 내렸다. 앞서 언급한 명예훼손 소송은 이러한 배경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한편, 뒤늦게 자신이 국정원의 공작에 넘어간 것을 알게 된 김경필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1999년 1월, 정기적인 교체시기가 아닌데도 평양으로부터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김경필 부부는 북한에 남겨둔 아이들의 안위가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유럽 소재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가지 않은 것은 한국에 이미 북한 간첩이 침투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그는 한,미 정보당국에게 송두율의 정체에 대해 상세하게 실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필 부부는 그 후 미 정보기관의 보호 아래 미국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송두율은 아마도 국정원의 이러한 완벽한 내사동향을 몰랐던 듯 하다. 만일 알았더라도 그는 이종석, 서동만, 정연주 같은, 청와대와 국정원, KBS의 핵심 위치에 있던 그의 제자들이 -소위 말하는 내재적 접근론자들이[3]- 그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듯 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권력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국정원 수사요원들이 제시하는 명백한 물증과 끈질긴 추궁에, 결국 송두율은 자신의 정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의 비호 아래 허겁지겁 독일로 되돌아 갔다. 이 사건은 사실이 권력을 이긴 드문 경우로 기록되었다.통일정책연구소 간 황장엽 저 북한의 진실과 허위 77 페이지 관련 부분 참조.
월간조선 2003년 11월 호“송두율-국정원의 공작 비화” 제하 기사 및 동 지 2004년 5월 호“송두율의 친북활동을 담은 두 장의 디스켓의 실체” 제하 기사 참조.
내재적 접근법이란 “북한을 북한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황당한 궤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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