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과정 교육은 그리 만만한 교육이 아니었다. 피교육생 신분이란 게 다 그렇지만, 머리가 굳어진 후 통제된 생활을 강요 당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간이나 하다 보면 지치고 진이 빠진다. 처음 몇 달간은 한겨울의 훈련이라 더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었지만, 그렇다고 지옥훈련 같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몇 주가 지나자 “퇴사하겠다”고 나서는 친구들이 생겼다. 제임스 본드를 꿈꾸고 들어왔는데, 막상 겪어 보니 논산훈련소에 재입소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퇴사하는 요원이 생겨 결원이 되면 금방 차순위 입소자가 그 자리를 메웠다. 나도 처음 세 달은 무척 견디기가 힘들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내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그런대로 잘 참고 넘겼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모두 곤색 유니폼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동할 때는 언제나 줄을 맞추어 걸었다. 다행히 발까지 맞출 필요는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청사 내에서 선배 직원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저 멀리서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해야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단지 선배라는 이유로 소리 높여 인사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는 대개 아침 6시에 시작되었다. 한 겨울의 아침 6시는 캄캄한 새벽이다. 기상나팔은 없지만, 방송실에서 보내주는 기상 음악소리에 잠을 깼다. 노래 선정은 학생회장이 했는데, 대개 경쾌한 곡조로 골라 틀었다. 학생회장은 한 두 달마다 돌아가면서 선출했다. 한 번은 짓궂은 동기 녀석이 『철의 노동자』를 트는 바람에 모두가 혼비백산 하기도 했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양지관 앞에서 아침점호부터 했다. 점호가 끝나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청사 내에서 2Km 정도 아침구보를 했다. 대개 사열 종대로 줄을 맞추어 군가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구보했다. 군대 제대하고 나서 다시 군가를 부르는 것이 어딘가 좀 어색할 때가 있었다. 구보가 끝나면 씻고, 방 정리하고, 수업준비를 한 후 아침식사를 했다.
수업은 보통 9시에 시작해, 하루 6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대개 한 시간 정도 합기도를 배웠다. 이렇게 하여 하루 일과가 끝나면 좋겠지만 그런 날은 거의 없었다. 정식 교과 과정이 끝나는 시간부터 정작 어려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군대에서 내무반 생활이 더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양지관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여러 가지 통제된 생활이 이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 또다시 단체 구보를 했다. 2Km 정도 하고 간단히 끝나면 그 날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대개는 운동장에 남아서 더 달리거나 체육관으로 옮겨가서 여러 가지 구기종목을 했다. 운동시간이 끝난 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거의 매일 집합이 걸렸다. 집합이 걸리면 또 다시 양지관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기나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비록 통제된 생활이긴 했지만, 양지관 생활 중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시간은 저녁 시간이었다. 물론 이 때에도 완전히 자기만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 강당에 모일 일이 생겼다. 입소 초기에는 거의 매일 모였다. 그리고 나면 또 다시 청소하고 정리하고 취침점호에 들어갔다. 이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끝나야 비로소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었다.
양지관에는 다목적실이라고 불리는 강당이 있었다. 이 강당은 그야말로 다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매일 밤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의 행사가 열렸다. 가끔은 영화를 보여 줄 때도 있었다. 시중에 개봉되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검열(?)하는 영화도 있었다. 훈육관이 어디에선가 필름을 구해왔다. 정보학교에서 시중에 공개되지도 않은 영화를 입수하는 것은, 아마도 정보기관이 잘 나갔던 시절의 유산이 아니었는가 싶다. 가장 먼저 봤던 영화는 스나이퍼(저격수)라는 영화였는데, 내용은 별로 시시한 영화였다.
어떤 때에는 선배들이 위문하러 와서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바로 위의 선배 기수들이 오기도 했고, 훈육관 기수가 온 날도 있었다. 대개 그런 날이면 푸짐한 음식도 같이 준비해 오곤 했다. 낮에 정식으로 받기 어려운 교육을 밤시간에 보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내용도 가지가지였다. 강사를 초빙하여 사교 댄스를 배우기도 했고, 사교 모임에서의 에티켓 같은 것을 강연할 때도 있었다. 차력사나 기(氣)치료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한 번은 관상전문가를 초빙한 적도 있었다. 그는 사람의 관상을 여러 가지로 나누면서, 그 중에서 가장 좋지 못한 얼굴을 “악완지상” 이라고 했다. 그 강의를 들은 후, 우리는 훈육관의 별명을 “악완이”라고 짓게 되었다. 우리를 괴롭히는 훈육관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하고픈 심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훈육관 없는 곳에서 우리끼리는 훈육관을 “아과니”라거나 “유꽈니”라고 불렀다. “유꽈니”는 물론 훈육관을 줄여 비하해 부른 말이었다. 훈육관은 듣고도 못 들은 척 해 주었다.
양지관 생활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일 중의 하나가 취침 점호였다. 논산훈련소에서나 하던 취침점호를 양지관에서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양지관의 취침 점호는 논산훈련소에서보다 더 까다롭게 시행되었다.
점호가 시작되면 훈육관은 각 방의 청소상태나 사물정돈 상태부터 철저히 점검했다. 점호 시 번호와 성명을 복창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 복창 소리를 장난이 아니게 크게 질러야 했다. 양지관이 아주 떠나갈 듯이 요란스러웠다.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저 멀리 복도 끝에서 “51번 이영○입니다”라고 소리치던 친구의 고함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 하다.
점호를 하다 갑자기 집합이 걸리는 수가 종종 있었다. 옛날 선배들은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 바람으로 양지못으로 뛰어 들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행히 그 정도로 험악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여자 동기들 덕택이었을 것이다. 훈육관이 아무리 악독해도 한 겨울에 여자들을 얼음물 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꽤나 시달렸다. 그나마 구타나 가혹행위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여자 동기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정규과정 교육은 크게 전반기 과정과 후반기 과정으로 나뉘어졌다. 전반기 과정은 정보요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품성을 기르기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로 기본 교양 과목을 배웠다. 물론 건전한 국가관을 함양하기 위한 정신교육에 주안점이 주어졌다. 영어와 일어도 100시간씩 배우고, 정보원이 알아야 할 다양한 주제의 교과를 배웠다. 국내정세와 국제정세, 북한정세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국정원 교육이라고 해서 뭔가 기상천외한 것을 교육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모 신문이 국정원의 정규과정 교육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if !supportFootnotes]-->[1]<!--[endif]--> 기사를 보니 그제나 이제나 교육 분위기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 기사에서는 정규과정 학생들이 기억술이나 독심술 등을 배우는 것으로 소개되었는데, 조금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정규과정 교육을 받는 중에, 가끔은 희귀한 자료를 접할 기회도 있었다. 우리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서 기쁨조가 캉캉춤을 추고 있는 영상물을 본 적도 있고, 한총련의 비밀 대의원 회의를 찍은 비디오를 본 적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아마 실무부서에서 입수한 자료들이었을 것이다.
전반기 교육에는 체력 단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반기 말에 계획되어 있는 공수훈련과 해양훈련에 대비하여 체력을 길러 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체력을 기르는 데는 아무래도 구보가 최고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줄을 맞추어 구보를 했다. 하루에 평균 6-7 Km는 족히 달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무릎 관절을 상하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자연히 구보 때마다 부상을 핑계로 열외하는 친구가 생겨 났다. 유독 상습적으로 열외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 녀석의 별명은 “열외거사”가 되었다. 나는 중국말로 그를 “리와이(列外)”라고 불렀다. 그는 아마 지금쯤 중국 땅 어느 하늘 아래에서 정보관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매일 합기도를 한 시간씩 단련했다. 우리는 합기도 교관을 “칠룡사부”라고 불렀다. 그 분의 성함이 О칠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합기도 실력이 대단했다. 시원한 발차기와 꺽기가 아주 일품이었다. 칠룡사부가 재미 있게 가르쳐 줘서 처음 한동안은 합기도가 교육과정의 활력소가 되었다. 우리는 전반기 교육을 마칠 때 즈음, 단체로 심사를 받고 모두 공인 유단자가 되었다. 이를테면 속성으로 단증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또한 권총 사격훈련도 받았다. 사격장은 양지관 근처 산기슭에 있었다. 사격 교관은 정재О이라는 분이었는데, 아마도 특등사수 출신인 것 같았다. 김재규 중정 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사격훈련이 그다지 강조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공기소총부터 시작하여 점차 실탄 권총사격까지 몇 십 시간 배웠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권총 사격에 상당한 자질을 보였다. 배운 대로 조준하고, 차분하게 격발한 뒤 표적을 확인해 보면 언제나 성적이 그런대로 괜찮게 나왔다. 우리 반에서는 나와 “열외거사”의 사격 실력이 가장 나은 편이었다. 우린 사격 실력을 놓고 조그만 내기를 걸기도 했다. 교육 후 실무에서는 실제로 권총을 잡아 볼 기회는 없었다.
전반기 교육이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르고 난 후에는, 역사탐방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도와 같은 사적지에 바람을 쐬고 오기도 했다. 역사교육을 담당했던 교수는 김창О이라는 분이었는데, 그 분은 수업 중에 우리들에게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열변을 토할 때가 많았다. 언젠가 역사탐방을 다녀오는 버스에서 친구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분도 그 책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데 공감해 주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처음 세 달간은 외출도 없는 지루한 훈련병 생활이 이어졌다. 가끔 목욕외출이라는 구실로 바깥 세상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 때에도 회사 부근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게 고작이었다. 대개 삼삼오오 잠시 나가 맥주나 한 잔하고 들어 와야 했다. 나 같이 결혼한 학생들에게는 이 때가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목욕외출은 결혼한 교육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훈육관인 배려한 제도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아내와 꿀 같은 접선(?) 시간을 가졌다. 입사 바로 직전에 황급히 결혼하느라 제대로 된 신혼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간이 더욱 더 절실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목욕 시간이 되면 아내에게 전화해서 회사 앞에 대기하도록 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여관 문을 나서다, 아는 동기 부부들과 서로 멋쩍은 조우를 하기도 했다.
나는 본시 별로 좋은 교육생이 아니었다. 성적은 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서, “다시는 성적을 가지고 남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더라도 양보하기로 했다. 다른 동기들은 시험을 준비하느라 밤 늦게까지 공부하곤 했지만, 나는 언제나 태연 작약했다.
다들 성적에 신경을 쓰느라, 더러 컨닝 비슷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백지를 낼지언정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나는 친구들에게,“봉황은 오동나무 가지가 아니면 앉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며 혼자 고고한(?) 척 주접을 떨었다.
시험은 대개 주관식으로 출제되었는데, 나는 그야말로 “주관적인” 답안을 냈다. 그런데, 가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때도 있었다. 교수님들 중에서는 틀에 박힌 모범 답안보다 나의 “독창성”이 듬뿍 반영된 개성 있는 답안지를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와 언론을 가르쳤던 박상О 교수님이 나의 반골 기질을 높이 사 주었다.
과목 가운데 영어 성적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새로 배우는 과목들은 성가시기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어가 골치거리였다. 나는 아예 열등생으로 분류되어 특별 관리대상이 되었다. 가끔 교수님께 불려가 혼나곤 했다. 그래도 ‘공부해야겠다’는 향학 열의가 별로 생기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경쟁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성적 상위자 20명을 뽑아 교육 후에 2주간 미국으로 여행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당근도 나에게는 아무런 동기부여가 되질 않았다. 모르긴 해도, 나는 아마 성적 하위자 20위 권에 들었을 것이다.
이 시절 나는,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운동은 원 없이 했다. 나는 매일 밤 짬을 내어 혼자서 양지관 지하 체력 단련실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나의 인생 중에서 이 때가 가장 체력이 좋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땐 나도, 근육맨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짱 정도는 됐다. 웃통을 벗고 달리기라도 하면 여자 동기들이 “우~”하고 야유를 보내곤 했다. 하복 맞추러 갔을 때 재단사 아가씨가 “무슨 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는 노상 졸았다. 아마도 과도한 체력훈련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교수님들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지간히 졸더라도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정보학을 가르치는 모 교수님은, “우리 동기 중에서 수업시간에 제일 많이 졸던 동기생이 가장 먼저 부서장을 지내고 벌써 퇴사했다”면서 고맙게도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교실 내에서 자리를 번갈아 바꿔가며 앉았다. 여러 친구들과 사귈 수 있도록 한 훈육관의 배려였다. 한 번은 이충О이와 짝이 되었는데, 그는 여러모로 재미 있는 친구였다. 어느 외국 제약회사에서 영업사원을 하다 입사했다는데, 순발력과 기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유머가 있어 좋았다.
그 녀석과 이런저런 농담을 하던 중에, “앞으로 어떤 직원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얘기가 나왔다. 그는 “까도 까도 속이 안 보이는, 양파 같은 공작관이 되겠다”고 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몇 조각으로 나누어 운용할 수 있는, 마늘 같은 정보관이 되겠다”고 했다.
그 날부터 우리는, 이름하여 각자 『양파허심법』과 『마늘분심법』을 연마하자는 데 의기 투합했다. 그는 성공적인 허심법을 단련한 덕분에 지금쯤이면 훌륭한 공작관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나는 분심법을 연마하던 도중에 노벨상이라는 고비에서 주화입마에 걸린 꼴이 되고 말았지만.
중앙일보 2006. 5. 29. “국정원 교육현장 언론 첫 공개” 제하 기사 참조.
요즘은 사격이 레져 스포츠쯤으로 인식되기 때문인지, 내곡동 청사 내 국가정보관에 시뮬레이션 사격장이 설치되어 있어 일반 방문객들도 연습사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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